[227호-4] 재난 현장에서(2) “뻔한 소리만 해서 죄송합니다”
[227호-4] 재난 현장에서(2) “뻔한 소리만 해서 죄송합니다”
  •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 승인 2019.04.18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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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현장에서(2)

“뻔한 소리만 해서 죄송합니다”

12시간 생방송... 마이크 놓고 나서야

제 역할 못했다는 자책감에 뼈 아파

박영민 기자/ 사회부

 


선선한 밤공기가 느껴져야 할 그곳은 탄내가 진동했습니다. 속초 톨게이트를 통과해 시내 쪽으로 진입하기도 전에, 도로 주변은 그야말로 불바다였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불길은 나무를 타고 크게 치솟았고, 희뿌연 연기가 제가 서 있는 곳으로 밀려왔습니다. 눈을 뜨기도 숨을 쉬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현장 상황을 간략하게 적은 원고를 올리고 MNG 연결을 준비했습니다. 그 사이에도 불길은 쉴새 없이 시내 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스튜디오에서 현장에 있는 제 이름을 불렀을 때, 순간 무슨 말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머릿속이 새하얘졌습니다. 상황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속초로 출발하기 전에 선배는 보이는 대로 현장 상황을 설명하면 된다고 했지만, 보이는 건 불과 연기뿐이었습니다. 결국 이곳이 어디인지, 주변엔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 상태에서 불이 시내 쪽으로 번지고 있다는 수준의 '뻔한 소리'만 하고 말았습니다.

시내로 번진 불길은 LPG 가스충전소와 주유소 근처까지 다가왔습니다. 근처에서 연결을 준비하던 중에도 무언가 깨지고 터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가스충전소가 폭발했다는 타사 보도가 나왔고, 소방에서 공식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 연결 순서가 다가왔습니다. 고민 끝에 이 런 이야기도 들린다는 수준의 말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실만 전달해야 한다는 '전원구조' 오보의 교훈은 확실한 기준점이 됐습니다.

당초 계획과 달리 특보는 동이 뜰 때까지 계속됐고, 현장에서의 뻔한 소리는 계속 방송으로 전달됐습니다. 불이 난 곳을 찾아 장소만 옮겼을 뿐 정보의 질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속초에서 지역순환근무를 했던 촬영기자 선배 덕분에 지명이나 불길의 방향이 어느 쪽인지 등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나마 담을 수 있었습니다. 그사이 다행히도 바람은 잦아들었고, 전국에서 달려온 소방대원·산림청 산불진화대 덕분에 더 큰 피해를 막아냈습니다.

첫 중계 이후 12시간 동안 속초 현지 상황을 전달하고 나서야 교대를 하고 마이크를 내려놓았습니다. 그제야 각종 포털과 SNS에 재난주관방송사인 KBS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디로 어떻게 대피해야 하는지, 현재 교통이 차단된 도로는 어디인지 신속하게 알려주지 않았다는 비판은, 뻔한 소리를 했다는 자책감에 더 뼈아프게 다 가왔습니다. "수신료의 가치를 보여드리겠다"는 포털 네임카드도 부끄러웠습니다. 온 국민의 이목이 쏠린 그 순간, 제 역할을 못 했다는 자책감은 2박 3일간의 출장이 끝나고 나서도 쉽게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재난 관련 정보를 적극적으로 알려서 피해 최소화한다'는 재난방송 목적은 잘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저 스스로 준비도 연습도 부족했습니다. 저 자신도 느끼고 있듯, 이번 일을 겪으면서 회사도 부족한 점에 대한 시스템 개선에 나섰습니다. 취재기자들을 지휘할 현장 데스크·본사와 지역국 기자와 데스크 모두가 함께 정보를 공유하는 단체 대화방 등이 없었던 점 등 저마다 아쉬운 부분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견들을 충분히 취합해서 다음번엔 재난방송의 목적에 더 가까운 방송을 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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