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호-4] 고생했던 만큼 ‘좋은 재난방송’이었을까?
[237호-4] 고생했던 만큼 ‘좋은 재난방송’이었을까?
  •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 승인 2020.09.29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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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합원 기고문 | 현장의 목소리

고생했던 만큼 ‘좋은 재난방송’이었을까?

취재구역 / 정유진 조합원

 

  끝이 보이지 않았던 장마에 뒤이은 태풍까지, 습기로 가득했던 여름이 끝났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재난 특보도 많았습니다. 시민들의 피해 최소화를 위해 재난에 대한 정보를 주는 것은 방송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선후배들도 끝없이 이어지는 특보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고생했습니다.

 

여전했던 ‘시간 채우기’식 중계방송
 

  하지만 고생한 만큼 좋은 재난방송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재난 특보의 대부분이 중계차와 제보 영상 소개로 채워졌다는 점입니다. 물론 폭우나 태풍 때 현장 상황을 보여주며 시청자들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각 기관이 실시간으로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이번 특보의 경우 실제로 비가 오지 않거나 태풍이 불지 않는 상황에서도 중계차가 강행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새롭게 추가할 내용이 없어서 한 시간 전 방송됐던 것과 같은 내용이 그대로 반복됐고, 현장에서는 “지금은 빗줄기가 약해진 상탭니다” 같은 민망한 멘트의 중계방송을 해야 했습니다. 제보영상 소개도 마찬가집니다. 취지는 ‘경각심을 준다’는 거였겠지만, 사실 특보 시간을 채우기 위해 재난을 하나의 구경거리, 스펙터클로 전락시켜 버린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지나친 중계차 의존과 재난의 구경거리화. 모두 예전부터 지적돼 온 문젭니다. 이걸 탈피하고 이번에는 ‘제대로’ 재난방송을 하자며 재난센터가 만들어졌고, 실제로 터치스크린 등 새로운 포맷의 방송, 공들인 필러, 전문가 대담 등이 이뤄졌습니다. 재난센터는 제 역할을 해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왜 제 눈에는 이번에도 예전과 비슷한 문제가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걸까요?

 

‘라이브’한 편성 필요

  저는 근본적으로 우리 특보에 라이브성이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에서 기자가 비 맞는 그 라이브성 말고, 편성 차원에서의 라이브성 말입니다. 태풍 ‘바비’ 상륙 때를 단적인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비는 당시 기상청의 예측과는 달리 남한에 직접 상륙하지 않았고 실제 피해도 예상보다 적었습니다. 그런데도 특보는 26시간이 진행됐습니다. ‘이미 그렇게 하기로’ 정해둔 거였기 때문입니다. 26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어떻게 질 높은 컨텐츠로만 채울 수 있겠습니까? 현장 중계차 뺑뺑이와 제보영상 소개로 채울 수 밖에요.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7월 23일 밤입니다. 갑작스러운 폭우로 부산에서 사망자까지 발생했지만, 우리 회사에서는 당시 방송중이었던 ‘더 라이브’를 계속했고, 특보는 사망자 발생 3시간쯤 뒤인 다음날 새벽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날 그 폭우가 ‘예정에 없던 일’이었기 때문이었겠죠. 

 

기민한 편성과 본부 간 협조가 답

  한번은 특보가 너무 길어서 문제였고, 한번은 특보가 늦어져서 비판을 받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비슷해 보입니다. 편성에 있어서의 기민한 대처 부족입니다. 기상청이 예보하지 않았더라도 상황이 심각해지면 바로 특보를 열어야 하고, 예보와 달리 상황이 심각하지 않으면 빨리 일반 편성으로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이 죽었는데 재난방송 주관사라는 KBS는 뭘 하고 있냐”는 비판을 피할 수 있고, 의미 없는 중계차와 제보영상 소개로 채워진 긴 특보를 막을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긴 특보는 시청자와 KBS 구성원들 모두에게 피로감만 줄 뿐입니다.


  이번 여름 KBS 구성원 모두는 현장에서, 사무실에서 치열하게 일했고 많이 고생했습니다. 하지만 이 고생이 제대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특보 편성에 있어서 책임자의 기민한 대처와 적절한 판단, 서로 다른 본부들과의 협조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상이변이 점점 심해지면서 재난 특보를 해야 할 일도 더 많아질 것 같습니다. 다음번 재난이 왔을 때에는, 적시에 열리고 적시에 닫히는 그런 특보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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