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시작> 방영 결정, 진정 <몰락의 시작>을 하려는가
혹 <기적의 시작>이라는 영화를 들어본 적 있는가? 8.15 광복절을 맞아 사측이 ‘특별히’ 준비하고 있는 영화라고 한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로 작년 말에 개봉한 뒤 올해 초 재개봉, 2만여 명의 관객 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최근 10여년 간 영화 구매 데이터를 살펴보니, 압도적인 최저 관객수 영화이다.
만듦새보다 ‘의미’로 봐달라?
아무리 저예산 다큐영화임을 감안하더라도 <기적의 시작>의 만듦새는 안쓰러운 수준이다. 조악한 내레이션과 자막 폰트, 노래방 화면을 연상시키는 재연씬까지. 양질의 콘텐츠와 고품격 다큐멘터리에 익숙한 시청자들의 눈높이에 턱없이 부족한 화면들이 매 순간 전개된다. 왜 굳이 이런 수준의 영상을 제공하려 하는 걸까? 편성본부장은 면담 자리에서 “작품이 투박하고 단순한 느낌”이라며 작품의 질적 수준을 인정하면서도 “(질적인 면보다) 의미로 가는 영화”라며 작품에 담긴 메시지에 주목해 달라고 당부했다.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 한 분의 지대한 업적”
<기적의 시작>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을까. 다양한 출연자들이 등장해 자신의 의견을 펼치지만 백선엽, 황장엽 등 극우적 인사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때문에 주장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의 건국은 “이승만 대통령 한 분의 지대한 업적”으로 표현된다. 3·15 부정선거나 4·19혁명은 밑에 사람들이 잘못해서 벌어진 ‘누명’이며 대통령의 하야는 ‘위대한 결단’으로 포장된다. 한국 현대사의 논쟁적 인물 이승만을 다루고 있지만 최소한의 균형 감각과 성찰 없이 오로지 칭송과 미화뿐이다.
‘그가 기도하자, (주변에서) 빛이 났다’
‘제대로 나라를 만들려면 기독교를 근본으로 삼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지나친 기독교적 세계관도 문제다. 한국의 독립과 건국, 발전의 밑바탕에 기독교가 아니었으면 불가하다는 식의 주장을 다수의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 이승만이라는 ‘기적적 인물’, ‘메시아적 초인’에 기대어 이 나라가 독립하고 발전해 왔다는 주장에 공영방송의 시청자들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까. 만듦새의 수준을 떠나 <기적의 시작>에 담긴 메시지는 너무도 일방적이고 극단적이며 위태로운 지경이다.
‘영화니까 괜찮아’ … ‘편집하면 괜찮아’(?)
이러한 우려에 대해 편성책임자의 답변은 참으로 천하태평이고 아찔하다. <기적의 시작>은 “역사 다큐가 아니라 영화”이기 때문에 인물의 공과(功過)에 대해 균형감 있게 접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기적의 시작>은 다큐가 아닌 영화이기 때문에 공정성 시비를 비롯한 각종 리스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처참하다. ‘다큐멘터리 영화’와 ‘극 영화’도 분간하지 못하는 그 무지함에 말문이 막힌다.
편성본부장은 “정 문제가 되는 부분은 편집을 할 계획”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편집을 위해 감독과도 수차례 통화해 승낙을 받았다”고 안심시키기도 했다. 이해 불가다. 덕지덕지 편집을 해야 하는 콘텐츠라면 왜 기를 쓰고 방영을 고집하려 하는가. 언제부터 편성본부장의 임무가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편집을 호소’하는 일이 되었는가. 그 자리, KBS의 미래 비전을 고민하고 최대한 양질의 콘텐츠를 공급하기 위해 골몰해야 하는 자리 아니던가. KBS 편성책임자의 수준이, 아니 KBS의 수준이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고 있다.
공영방송을 지키는 사람들, 하지만…
해당 부서의 실무진들은 1) 인터뷰이들이 극우 인사로 편중된 점 2) 인간 이승만과 기독교가 지나치게 미화된 점 3) 제주 4.3 사건 / 3.15 부정선거 / 4.19 혁명 등에 대한 시각이 일방적인 점 4) 관객 수에 비해 지나치게 구매 가격이 높은 점 등 <기적의 시작> 방영과 관련된 우려사항을 수차례 보고했다. 방영 결정에 앞서 ‘사전 다중 심의’나 ‘편제위 상정’ 같은 시스템을 통해 폭넓은 의견 청취를 제안하기도 했다. 공영방송 KBS에 생채기가 나지 않도록 고민하고 또 고민한 결과다. 하지만 편성본부는 끝내 악수를 두었다. 실무진들의 합리적인 우려에는 눈과 귀를 닫은 채, 해당 국장이 직접 기안을 하고 편성책임자인 본부장이 전결하는 기이한 형태로 구매를 결정했다고 한다.
누구를 위한 <기적의 시작>인가
그대들 스스로 자문해 보길 바란다. 누구를 위하여 <기적의 시작>은 방영되어야 하는가? 시청자들을 위해서인가, 윗선의 그 누군가를 위해서인가. 대체 무엇을 위하여 <기적의 시작>은 방영되어야 하는가? 공영방송 KBS의 콘텐츠 경쟁력을 위해서인가 자기 자신의 ‘자리 보전’ 경쟁력을 위해서인가. 그대들의 이토록 무책임한 결정에 수신료 민원 현장의 직원들은 반겨줄 것인가, 분노할 것인가.
자문해 보았는가? 아직 20여 일의 시간이 남았다. 결정을 철회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부디 KBS <몰락의 시작>을 재촉하지 말라.
2024년 7월 26일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