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바타유는 소설가이며, 인류학자이자 철학자며 사회학자이
다. 전방위에 걸쳐 활동한 이력 때문인지, 그의 소설에서는 다중적 자아가 보인다, 이 소설의 경우 두 얼굴의 신, 야누스의 이름을 빌어 여러 차례 글을 썼다, 포르투갈의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처럼 말이다.
그의 소설은 읽기 불편할만한 요소들이 많다. 섹슈얼리티를 소재로 빌어 온 작품의 문체나 표현들이 생경하고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과 죽음에 천착된 거친 사유들은 세련된 문장으로 만들어진 현대 주류 문학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묘한 쾌감을 선사한다. 그가 이 책의 말미에 적은 5가지의 정의들은 흥미롭다.
첫째, 욕망 - 욕망은 그 자신이 스스로 부정하려는 욕망임을 사전에 알 수 없다.
둘째, 불안 - 우리 내명의 불안은 실체가 없다.
그것의 본질은 두려움이라기보다는, 개인을 향한 갈증이다.
셋째, 죽음 - 오직 죽음만이 내게 공포의 모양새를 부여할 만큼 광적이다.
넷째, 공허 - 시의 횡포가 남긴 우리 내면의 공허는 주어진 것을 초극하려는 의지의 척도다.
다섯째, 불가능 - 불가능, 그것이 문학이다.
욕망, 불안, 죽음, 공허, 불가능. 이것들은 우리의 가까이에 있으며, 사고 작용을 통해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것들이다. 그가 고르고 정의한 이 다섯 가지 키워드 중 제목으로 정해진 '불가능'이란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학이란, 교훈을 주고 가르치는 일이 아니다. 정보를 제공하는 일도 아니다. 문학의 본령은 끊임 없이 양질의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우리의 앎은 보편화 된 정의들이다. 그것은 개개인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다. 김소연 시인은 시 ‘ 모른다’에서 ‘시는 모른다. 알고 쓰는 것은 시가 아니므로’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문학에 대한 고백만은 아니다. 삶의 도사리는 ‘불가능’에 관한 이야기이다. 같은 맥락으로 바타유가 정의한 문장에서 ‘문학’이란 단어는 ‘삶’으로 치환할 수 있겠다.
우리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이다. 우리는 불가능의 삶을 살아내고, 완전히 불완전한, 개별체들이다. 욕망과 불안과 죽음과 공허의 대기에 둘러싸여 불가능을 체험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불가능, 그것이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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