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윤의 고함소리] 신비롭게 오묘하며 기적적인 팩스 한 장
[현상윤의 고함소리] 신비롭게 오묘하며 기적적인 팩스 한 장
  •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 승인 2014.10.17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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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윤의 고함소리 4화

 

6.29 선언 이후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직선제를 쟁취한 이후 시민들은 둘만 모여도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하나?’ 혹은 ‘전두환 이후 차기 대통령은 누가 될 것인가?’를 가지고 토론했다. 87년 여름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열기가 가장 뜨겁게 불타던 시기다. 하지만 KBS는 여전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30대 초반의 열혈 청년 현상윤으로서는 참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아주 난 미치겠는 거야. 세상은 엄청나게 변하고 있는데 회사 안은 너무 조용해. 아니 KBS 사람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는데, 세상 변하는 걸 모르는 게 아니거든. 그냥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거야. 그걸 보고 있으려니까 내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거지. 근데 내가 명동성당 사건 이후 요시찰 인물이 되어 있었다고. 뭘 하기가 좀 그래. 그래서 참 갑갑하게 회사 생활을 하고 있는데 7월 중순 쯤인가 보도국에 팩스를 보내러 갔어. 그때는 사무실마다 팩스가 있는 게 아니어서 팩스 한번 보내려면 보도국에 가야 했단 말이야. 그래서 팩스를 보내러 갔는데 ‘찌이잉, 찌이익’ 팩스 한 장이 들어오네. 뭔가 하고 이렇게 봤어. 내용을 보는 순간 손이 덜덜 떨리더라고. 진짜 손이 덜덜덜 떨려. 그때 받은 팩스가 뭐냐면 MBC의 <방송민주화투쟁선언문>이야.

<자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냥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좀 부족하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현상윤이 그 팩스를 받았냔 말이다. 확률적으로 보도국의 기자가 받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그 팩스는 현상윤 PD가 보도국에 잠깐 들른 그 시간에, 딱 그 타이밍에 맞춰 도착했다. 이건 뭔가 신비롭고 오묘하며 기적적인 일이다.

당시 MBC에 당했던 얘들이 있었어. 무슨 이야기냐면 기자들이 시위 현장에 취재를 나가잖아, 거기서 당한다고. 시민들한테 욕먹는 건 뭐 아주 예사고 돌멩이 맞고 취재차량 박살나고 그랬거든. 그걸 겪었던 현장 기자들 중심으로 MBC 내부에서 총회가 열린 거야. 그리고 다음날 PD들까지 합류하면서 MBC <방송민주화투쟁 선언문>이 만들어진 거지. 그러니까 사회적인 격변이 방송사 안으로 옮겨온 거야. 방송도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조직화된 거야, MBC에서. 그런 면에서 당시에는 MBC가 KBS 보다 훨씬 나았던 거야. 아무튼 그 선언문을 받고 그 자리에서 쭉 읽는데 정말 손이 벌벌벌 떨리는 거야. 다리에 힘이 쭉 빠지면서 주저앉을 것 같더라고.

만약 이 팩스를 현상윤이 아닌 다른 사람이 받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팩스를 당시 보도국 간부가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아마 그 선언문은 바로 보도국장, 사장에게 보고되고 회사는 직원들의 동태(?) 관리에 더 신경을 썼을 것이다. 다혈질의 간부였다면 바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KBS에서 그 선언문을 제일 먼저 입수한 사람은 현상윤이었다. 선언문이 임자 하나는 제대로 만난 것이다.

이걸 어떻게 할까 하다가 일단 300장을 복사했지. 그리고 몰래 뿌리는 거야. 사실 종로경찰서 사건도 있고, 명동성당 건도 있고 해서 내가 눈치가 많이 보였거든. 그러니까 뿌리는 게 쉽지가 않아. 적당히 눈치 봐가면서 사람 없는 책상에 몰래 올려놓고 뭐 그렇게 돌렸던 거야. 이게 편하게 나눠준 게 아니거든. 그런데 이게 또 기가 막힌 게, 그날 8기 PD들이 모임이 있었어. 교양국, 기제국에 있는 8기 피디들 모임이 있었다고. 원래는 그냥 편한 동기 모임이었어. 근데 이제 그 선언문이 화제가 된 거지. 그러면서 ‘KBS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나왔어. KBS에서는 처음으로 그런 이야기가 공론화된 거지. 그리고 다음날 바로 논의가 9기 11기까지 확대된다고. 8기들이 앞서 나가면서 9기, 11기가 합류하는 뭐 그런 형국이었던 거지. 8기 중에서도 논의를 주도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전용길 선배야, 전용길. 그리고 진기웅 선배, 김철수 선배 이런 분들이 주도했지. 근데 8기에는 ‘길’이 있잖아. 참 그 양반이 대단한 게 그때나 그 이후에나 ‘길’은 한 번도, 그런 일에는 한번도... 허허허.

여기서 ‘길’은 얼마 전에 회사를 떠난 바로 그 분, 길환영이다. 87년이면 8기 PD들이 7년차 시절이다. 심장이 뜨겁지 않기도 쉽지 않은 때이다. 그런데 그 분은 7년차에도 참으로 냉정(?)한 사람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그는, 방송민주화에 관해서는 그 이후에도 일관되게 냉정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시절 가장 뜨거웠던 전용길 선배가 길환영 사장 밑에서 본부장을 맡았다는 점이다. 그가 본부장 직에서 물러날 때 ‘아나운서 한 명의 폭주 때문에 밀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참으로 죄송한 이야기지만, 많은 후배들이 그의 말년을 좋게 기억하지 못한다. 뜨거웠던 자도, 냉정했던 자도 모두 아름답지 않게 회사를 떠난 셈이다.

8기, 9기, 11기가 모여서 ‘우리도 선언문을 작성하자’는 결의를 했지. 전용길 선배가 선언문을 작성하고, 그때 막내 급이었던 우리 11기들이 KBS 전체에 선언문을 배포하기로 결정했지. 그래서 우리는 이제 다 준비를 하고 있는데, 막상 실행을 하려고 하니깐 000선배랑 000선배가 좀 주저하는 거야. 겁을 내기 시작하더라고. 뭐 근데 그때 KBS 상황을 생각하면 겁나는 게 당연해. 그래서 당시에 좀 신망이 있던 선배들한테 자문을 구하기로 했어. 선배들 ‘이렇게 너희들만 움직이면 위험하다’고 하면서 논의를 좀 더 선배 그룹까지 확대하자는 의견이 나왔어. 그래서 일단 선언문 작성은 중단이 됐고, 밑에서부터 차근 차근 선배들을 만나러 다녔지. 금세 공채 1기까지 논의가 확산 됐어. 그때 000선배랑 00선배가 중간 고리가 되고 6기, 4기, 3기, 1기까지 참여하게 되는데 1에서는 곽00, 이00 선배가 많이 주도를 했어. 심지어 강00까지도 참여했다고.

1기부터 11기까지, 정말 주옥같은 이름들이 튀어나왔다. 존경받는 분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이른바 구악이라 불리는 사람들, 정치권에 줄을 대 KBS를 흔드는 자들의 이름도 등장했다. 그들도 한때는 모두 방송민주화를 외치던 사람들이었구나. 갑자기 한 성명서가 떠올랐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항의방문을 온 다음날 아침, 38기 후배들이 올렸던 성명서다. ‘동기들을 기레기로, KBS를 세월호로 만들지 마십시오.’라는 제목의 그 성명서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선배들도 한번쯤은, 언론인이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구악이 되어버린 그들이 언론인이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그때 공채 1기까지 논의가 확산되면서 ‘우리에게도 조직이 필요하다. 일단 PD협회를 만들자!’는 쪽으로 결론이 흘러간다고. 근데 협회를 만들려면 일단 총회 같은 것을 해야할 거 아냐. 그래서 총회를 열기로 했지. 그때는 지금 신관 주차장 자리에 ABC 가건물이 있었다고. 아시안 게임 중계를 하려고 만든 가건물이 있었는데 거기에 PD들이 모인 거야. 뭐 열기가 아주 굉장했다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정말 열기는 대단했어. 지금 내가 막 이야기하니까 이런 과정이 오래 걸린 거 같지? 아니야. 팩스 받고 총회 열기까지 딱 3일 걸렸어, 3일.

현상윤 PD가 우연히 받은 팩스 한 장, 그것은 3일 만에 역사적인 첫 PD총회로 이어진다. 물론 이건 그냥 우연이다. 현상윤 PD가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MBC의 방송민주화투쟁 선언문은 KBS에 전달되었을 것이고, PD총회는 열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사적인 팩스 한 장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현상윤 PD가 받았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뭔가 신비롭고 오묘하며 기적적인 일이다. <고함소리> 5회에서는 첫 PD총회가 PD협회로 발전하기까지, 그 숨 막히고 조마조마한 과정을 풀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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