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하고도 물먹은 ‘정윤회 문건’ 보도
취재하고도 물먹은 ‘정윤회 문건’ 보도
  •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 승인 2015.03.17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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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적 외면? 가치 판단 미스? 언제까지 받아쓰기만 할텐가?

지난 11월 28일 ‘세계일보’는 1면 머릿기사를 통해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이 작성한 내부 문건을 인용해 ‘증권가 찌라시’에 떠돌던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 교체설’은 정윤회 씨가 비선라인을 활용해 퍼트린 루머였으며 이 과정에서 박근혜 대통령 측근인 이른바 ‘문고리 권력 3인방’을 비롯한 청와대 안팎 인사 10여 명이 관여했다는 단독 특종 기사를 보도했다. 그동안 정치권 안팎에서 떠돌던 대통령 비선 실세들의 국정 개입 의혹이 청와대 내부 문건에서 확인된 상당히 큰 파급력을 지닌 기사로 이날 하루종일 이슈가 됐던 사안이었지만 KBS <뉴스9>는 이 사안을 뉴스 중반대인 11번째 순서에 단 한 꼭지로 보도했다. 이날 3번째 꼭지로 보도한 SBS나 톱부터 박 대통령 대선 선대위에 몸담았던 이상돈 교수와의 인터뷰까지 무려 6꼭지를 보도한 JTBC에 비해 이 사안에 대해 매우 낮은 뉴스 가치를 매긴 것으로 이후 벌어지고 있는 파장을 고려할 때 이는 의도적 외면이었거나 뉴스 가치에 대한 명백한 판단 미스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이날 우리 뉴스를 본 시청자들로서는 이 사안에 대해 이해를 하기가 어려웠다. 우리 뉴스는 감찰보고서가 아니라 동향보고 수준에 불과하다는 청와대의 해명이 나왔지만 문건 작성의 주체가 공직기관비서관실이라는 사실은 전하지 않았으며, 논란의 당사자인 정윤회 씨가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도 없었고, 문건 작성자로 알려진 박 모 경정과 문건 작성을 지시한 조응천 비서관이 문건 작성 얼마 뒤 청와대를 떠났다는 사실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잇따른 낙종과 한 발 늦은 보도

 

‘세계일보’의 특종 보도 이후 관련 사안을 적극적으로 보도한 건 역설적으로 보수 언론들과 종편들이었다. ‘중앙일보’는 지난 1일 관련 의혹을 전면 부인하는 정윤회 씨와 단독 인터뷰 내용을, ‘조선일보’는 지난 2일 정윤회 씨가 청와대 문고리 3인방 가운데 한 명인 이재만 총무비서관과 지난 4월 통화했다는 조응천 전 공직기관비서관과의 단독 인터뷰 내용을 각각 보도했다.

이에 반해 KBS는 파문이 확산되자 이에 따라가기에 급급했다. 첫 보도 다음날인 11월 29일에는 전날 JTBC에서는 이미 다룬 ‘정윤회 과연 누구인가’라는 리포트를 뒤늦게 보도했고, 문건 작성자인 박 모 경정의 문건 유출 부인과 검찰의 수사 착수 소식을 단순 전달했다. 정윤회 씨나 조응천 전 비서관과의 인터뷰를 한 것도 신문을 통해 인터뷰가 나간 뒤 뒤늦게 이뤄졌다.

조.중.동 조차 사설 등을 통해 연일 ‘국가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심각한 사안’, ‘찌라시 운운하기 전에 의혹이 남지 않도록 철저한 진상규명부터 하는 게 순서’, ‘정 씨가 비서관들과 청와대 밖에서 국정을 논의하고 인사 관련 지시를 주고받았다면 권한 없는 자의 국정 농단’이라며 강도 높은 톤으로 관련 보도를 쏟아냈지만 KBS는 박근혜 대통령이 관련 사안에 대해 입장을 표명한 1일에서야 뒤늦게 보도량을 늘렸다. 박 대통령이 수석비석관회의를 통해 입장을 밝힌 지난 1일 <뉴스9>는 톱부터 5꼭지를 이 사안에 대해 보도했다. 하지만 관련 보도 또한 ‘문건유출 국기 문란...일벌백계’를 외친 대통령의 입장과 여야 입장, 검찰 수사 전망, 이미 다 알려진 정윤회 씨와 박 모 경정의 인터뷰로 채워져 대통령 비선의 국정 개입 의혹이라는 사건의 본질을 파헤치려는 노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취재하고도 물먹은 한심한 KBS 보도

 

앞서 밝힌 대로 2일 조선일보는 조응천 전 비서관과 만나 ‘정윤회 씨가 지난 4월 청와대 핵심 3인방 가운데 한 명으로 알려진 이재만 총무비서관과 통화를 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 보도만으로는 조 전 비서관의 일방적 주장으로 검증이 필요한 상황에서 KBS는 중요한 사실을 취재를 통해 밝혀냈다. <시사진단>에서 이날 오전 정윤회 씨와의 전화인터뷰를 통해 정 씨가 박지만 씨에 대한 미행 의혹 건과 관련해 지난 4월 이재만 비서관과 통화했으며 이번 사건이 불거진 뒤 이재만, 안봉근 비서관과 통화했다는 녹취를 확보했던 것이다.

 

<정윤회> (지난 4월 조 전 비서관이) 도저히 전화를 여러 번 했는데도 안 받고 문자를 제 이름을 밝히고 좀 만나자고 그래도 안 만나주고 그래서 제가 그거를 부탁 한겁니다.

<시사진단> 이재만 비서관한테?

<정윤회> 네 나는 그런 사실이 없다. 그런 사실이 없다는 것과 조응천 비서관을 만나게 해달라 그겁니다.

<정윤회> 이재만 비서관하고는 그때 그 내용 갖고 한번. 조응천비서관내용하고요. 이번사건 터지고 나서 제가 이재만비서관하고, 안봉근 비서관하고 통화했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KBS의 대응을 그야말로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정오 무렵 이 같은 <시사진단>의 인터뷰 내용은 보도정보 정치부 창에 띄워져 공유가 됐지만 단신 기사는 오후 5시 6분이 돼서야 처리됐다. 더 심각한 것은 해당 단신에서 정 씨가 이 전 비서관과의 통화를 인정했다는 사실은 마지막 4번째 문장에서야 언급된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한 5시 뉴스 리포트의 리드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이 KBS와의 인터뷰에서 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정윤회씨와 연락을 취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전화를 건 당사자가 인정했는데 그걸 왜 3자의 주장으로 보도하는가? 기자 생활을 이제 막 시작한 수습기자들조차 이렇게 기사를 쓰지는 않을 것이다. 정 씨의 전화인터뷰 내용을 모르는 상황도 아닌데 이 같은 기사가 나왔다는 건 해당 사안에 대한 명백한 왜곡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의도를 했든 안 했든 이 같은 왜곡 보도는 메인뉴스까지 이어진다. 먼저 전날 <뉴스9>를 통해 보도된 정 씨의 주장을 보자.

 

정 씨는 지난 2007년 대선 이후 이재만 청와대 비서관 등 이른바 '십상시'로 지목된 사람들과 만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정윤회 : "그냥 민간인으로 살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걸 하겠습니까? 그리고 전혀 뭐 연락을 안 하고 만나지도 않는 그런 사이입니다."

 

불과 하루 만에 정 씨가 자신이 한 말을 뒤집었는데도 다음 날(2일) <뉴스9>에서는 이에 대한 지적은 전혀 없었다. 5시 뉴스와 마찬가지로 이재만 등과의 통화를 인정한 정 씨의 녹취는 사용하지 않은 채, 정 씨가 이재만 비서관을 통해 통화를 요청했다는 조응천 비서관의 주장만을 조 씨의 녹취와 함께 전했다.

 

우리가 취재를 다 해놓고도 이런 황당한 대처를 하는 사이 YTN 또한 정윤회 씨와 전화인터뷰를 갖은 뒤 관련 소식을 오후 2시 1분경 ‘단독’ 딱지를 붙여 ‘정윤회, 며칠 전에도 이재만과 통화...적극 대응’이라는 제목의 보도를 했고, 다른 언론들은 YTN의 보도를 인용 보도했다. 그 사이 ‘4월 연락은 조응천 개인 주장일 뿐’이라고 주장하던 청와대는 오후 5시경 ‘정윤회가 이재만에 전화했으나 둘 만남은 없어’라며 슬며시 입장을 바꿨고, KBS는 <뉴스9>를 통해 ‘청와대는 박지만 회장 미행설과 관련해 억울함을 밝히려던 정씨가 조 전 비서관과 통화가 잘 안되자 이재만 비서관에게 전화를 했지만 둘 간의 만남은 없었다고 밝혔습니다.’라며 정 씨와 청와대의 입장을 친절하게도 전해 주었다. 다음 날 조선일보의 1면 헤드라인 역시 ‘정윤회, 이재만·안봉근과 최근 통화’였다.

 

언제까지 받아쓰기만 할 것인가?

 

해법은 간단하다. 받아쓰기는 이제 그만하자. 정윤회를 물 먹고 조응천을 물 먹었으면, 이재만을 만나든 안봉근을 만나든 아니면 십상시 가운데 나머지 누군가라도 만나서 비선들의 국정 개입 의혹이 무엇이 사실이고 사실이 아닌지를 파헤치자. 국내 언론사 가운데 가장 많은 유능한 기자를 보유하고도 잇따라 물을 먹는 이유는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권력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기만 하는 KBS의 보도가 달라지지 않고서는 ‘내년 1월 1일부터 모든 게 바뀔 것’이라는 조대현 사장의 약속은 공염불에 불과할 것이다. 이제라도 기자협회가 제안한 대로 검찰, 경찰, 청와대, 정치권, 탐사보도를 담당하는 유능한 기자들을 불러 모아 취재 T/F 팀을 조속히 꾸리자.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것이다.

 

 

2014년 12월 3일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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