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방송을 위해 녹화까지 마친 뉴스해설이 ‘총리 본인의 용단 요구는 시기적으로 빠르다’는 보도본부장의 수정 요구에 따라 다른 해설위원이 수정된 내용으로 녹화를 다시 해 방송하는 일이 벌어졌다.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이런 상황이 벌어진 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총리는 사의를 표명했다. 하지만 파문의 당사자인 강선규 본부장은 이 같은 제작자율성 훼손 행위에 대해 어떤 사과도 하지 않은 채 변명으로 일관했다. 일련의 과정에서 강 본부장이 밝힌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이 없는 궤변이었는지를 자세히 짚어본다.
용단 요구는 시기적으로 빠르다?
강선규 본부장이 수정을 요구한 해설의 내용은 두 대목이었다. ‘이 총리 결단해야’라는 제목과 ‘무엇보다 본인의 용단이 필요한 시점입니다.’라는 클로징이었다. 이에 대해 강 본부장은 ‘검찰 수사(결과)도 안 나왔는데 포퓰리즘으로 여론재판해서 나가라는 것인데 그건 근거가 좀 기다려야 할 시점으로, 시기적으로 빠른 것 같다’라며 수정을 요구했다.
해설이 녹화된 지난 16일경에는 여당 내에서도 사퇴를 촉구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었고, 야당은 해임건의안은 물론이고 탄핵까지 거론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총리 사퇴를 요구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총리가 금품 수수 의혹과 관련해 거짓말을 한 사실이 잇따라 드러나면서, 고위공직자로서의 가장 큰 덕목 가운데 하나인 도덕성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점이었다.
성완종 회장과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다고 부인했지만 23차례나 만났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성 회장이 지난 대선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가 유세장에 나와 있는 동영상이 공개되자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해명하면서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게 됐던 것이다. 이 때문에 논란이 된 해설이 나간 17일에는 대표적인 보수지인 중앙, 동아일보조차 ‘이완구 총리, 조속히 사퇴하고 수사에 응하라’, ‘박 대통령의 시한부 예고, 이 총리는 거취 정리하라’라는 제목의 사설을 낼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 본부장은 총리의 도덕성과 관련된 논란은 덮어둔 채 검찰 수사 결과를 지켜보자며 수정 요구를 했다. 강 본부장이 생각하는 적절한 사퇴 요구 시점은 언제였단 말인가? 검찰이 이 전 총리에 대한 수사를 마치고 유죄 의견으로 기소를 한 시점에야 가능하단 말인가, 아니면 검찰 수사 과정에서 이 전 총리가 범죄 사실을 시인해야 가능하단 말인가?
검찰 수사를 지켜보자는 강 본부장의 주장은 결과적으로도 오판이었다. 바뀐 뉴스해설이 나간 지 불과 사흘이 지나 이 전 총리는 사의를 표명했다. 그 사이 새롭게 나온 검찰 수사 결과는 아무 것도 없었다. 민심의 도도한 흐름과 정치권의 동향을 읽지 못했던 자격 미달의 보도본부장으로 인해 KBS뉴스는 가장 적절한 시점에 민심의 흐름을 반영한 뉴스해설을 내보낼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발로 차버렸던 것이다.
해설에 개인 생각을 담는 건 신중해야 한다?
부적절한 해설 교체 건으로 논란이 일자 강 본부장은 이에 대해 뒤늦게라도 사과를 하기는커녕 납득하기 어려운 해명과 궤변을 내놓았다. 밤새 총리가 사의 표명한 다음인 21일 아침 보도국 편집회의를 통해 강 본부장은 ‘KBS 해설은 신문의 논평이나 칼럼과 다르다, KBS 보도는 객관적이고 공정해야지 여론에 좌우되면 안 된다, 해설에 개인 생각을 담는 건 신중해야 한다’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방적인 주장을 내놓은 뒤, ‘이번 해설 교체에 따른 파문확산이 안타깝다’며 마치 남 일 얘기하듯 하는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을 펼쳤다.
강 본부장이 얘기하는 객관성과 공정성은 무엇인가? 당초 방송 예정이었던 해설에서 총리의 용단을 촉구한 근거는 이 전 총리가 3천만 원을 수뢰해서가 아니라 해명 과정에서 총리가 한 말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속속 드러나면서 신뢰를 잃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 해설의 어떤 부분이 공정성과 객관성을 잃었다고 생각하는가? 총리 사퇴 직전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도 ‘이완구 총리가 공정한 수사를 위해 사퇴해야 한다는 응답이 71.3%’(사회동향연구소 19일 조사)나 될 정도로 총리 사퇴 요구 여론이 높았는데, 이처럼 고위공직자의 거취와 관련해 부정적인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은 상황에서도 이러한 여론을 외면하는 게 객관적이고 공정한 보도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게 강 본부장이 생각하는 KBS 저널리즘인가?
‘KBS 해설은 신문의 논평이나 칼럼과 다르고, 해설에 개인 생각을 담는 건 신중해야 한다’는 말은 더욱 황당하다. 당초 녹화됐던 해설의 어떤 부분이 개인 생각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17일 해설에서 ‘이 전 총리에 대한 거취 문제를 거론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전날 아침 해설위원들이 참여하는 편집회의에서 의견이 모아졌던 것이고, 작성된 원고는 해설위원실장의 검토 뒤 사인까지 받은 원고였다. 보도본부장이 되기 직전 불과 1년도 안 된 시점까지 해설위원을 지냈던 강 본부장이 이런 절차를 몰랐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강 본부장은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당초 해설을 했던 A 해설위원이 마치 해설에 개인 생각이나 담는 신중치 못한 사람인 것처럼 폄훼하는 발언을 한 것이다.
보도본부장이 ‘뉴스해설’에 대해 의견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의견은 본부장이라는 자리의 권위를 빌은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 명확한 근거와 설득력을 가진 것이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의견이 결과적으로 잘못됐다고 판명됐을 때는 그에 대해 깨끗이 인정하고 사과하면 될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동료들과 후배들의 잘못으로 책임을 돌리는 것은 한 조직을 이끌어 가는 리더로서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무능보다 더 나쁜 건 부도덕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