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본부에 힘을 모아주십시오. 동지가 되어 주십시오.’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고 함께 하는 노조가 되겠습니다.”
벌써 두 달이 지났습니다. 전혀 예상에 없던 KBS본부 위원장에 취임한지……. 취임식과 노조창립 30주년 기념식, 대의원대회와 중앙집행위원회, 워크숍 등 어려운 일정 등도 한차례씩은 소화했습니다. 하지만 조합 활동이라는 것이 끝이 없더군요. 매주 한 두 차례의 회의와 노사간담회, 성명서 작성, 그리고 곧 시작될 언론노조와 방송사사장단간의 첫 산별교섭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늘 저에게 하는 질문입니다. “지금 너는 잘 하고 있는 거니?” “혹시 조합원들의 기대와는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니니?” “ 조합주의를 고집하다보니 보다 큰 그림을 못 보는 것은 아니니?”,아마 저와 집행부, 중앙위원 모두의 고민이고 임기가 끝나는 날까지 해결되지 않을 질문이겠죠. “끊임 없이 성찰하고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야.” 라고 답하는 것만이 지금의 방법입니다.
지난주 주목할 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진실과 미래 위원회>가 이사회를 통과했습니다.
KBS본부 5대 집행부는 출범과 동시에 사측에게 과거사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와 평가, 이에 따른 책임소재 명시와 재발방지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지난 9년간 KBS에서 벌어진 잘못에 대한 평가 없이는 ‘다시 KBS 국민의 방송으로’라는 지난 파업기간의 구호를 실천으로 전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보복을 위한 것 아니냐”고 주장합니다.
저는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조금도 양보할 생각이 없습니다. 단연코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 9년간 벌어진 일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토론과 대화는 실종됐습니다. 상식적인 비판과 지적은 불만세력의 푸념으로 치부됐습니다. 인사는 차별적으로 이뤄졌고 보상도 편파적이었습니다. 몰상식, 몰염치의 9년이었습니다. 이런 비상식을 지적하고 투쟁한 사람들은 해고와, 정직, 감봉, 징계 받았습니다. 동조하거나 침묵하면 오히려 보상이 내려졌습니다. 누가 이런 시절을 정상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사실과 진실에서 ‘국민의 방송 KBS의 길’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건강한 지적과 비판은 수용되어야 하고 이로 인한 특정 개인의 불이익은 없어야 합니다. 능력에 의해 등용되어야 하고 상식에 의해 배분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조건은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적과 비판, 논쟁의 방향은 특정 정치집단이나 이념집단의 이익을 대변해서도 안 되고 괘를 같이 해서도 안 됩니다. 자신의 ‘지극히 편향된 이념과 이익’을 ‘국민의 이익과 주장’이라고 근거 없는 억측으로 궤변해서도 안됩니다.
KBS본부 위원장으로 역임하는 기간도 이제 1년 6개월 정도 남았습니다. 짧지 않은 기간이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비판에 귀 기울이겠습니다. 논쟁을 피하지 않을 것이며 불평등과 불합리에 목소리를 높이겠습니다. 하지만 근거 없는 주장에는 단호하게 반박할 것입니다. 잘못된 과거는 지적하고 바로잡으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책임자에 대해서는 엄격한 징계의 잣대를 요구할 것입니다. 불의를 조사하고 바로잡지 않은 채 미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어설픈 용서와 화해가 훗날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역사가 증명해주기 때문입니다.
선배, 후배, 동료, 모든 KBS구성원 여러분! 그러나 이 작업은 결코 KBS본부 2천 2백여 동지들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보다 많은 구성원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KBS에는 직원 과반을 대표하는 조직이 없습니다. 지난해 파업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동료들이 KBS본부에 합류해 주셨지만 여전히 과반수 노동조합이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직원 과반수를 대표하는 노동조합이 없을 경우 발생하는 문제는 예상외로 큽니다. 사업장내에서 사용자와 노동자간 협의해야 할 임금, 복지, 근로조건, 인사, 채용 등 모든 일에 있어서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당장 개정된 근로기준법에 의거 주당 제한 근로시간인 올해 7월부터는 68시간, 내년 7월부터는 52시간으로 제한됩니다. 위반할 경우 사업주에게 처벌이 내려집니다. 따라서 모든 사업장은 법 적용이전에 근로자를 대표하는 노동조합과 근로시간 변경에 따른 합의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 KBS에는 사측과 근로시간 변경문제를 협의하거나 합의해줄 법적인 근로자 대표단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희 KBS본부노조는 이미 조합원수에 있어서 사내 다른 노조를 압도하는 제1 대표 노조입니다. 하지만 과반에는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만약 현재와 같이 조합원 수를 유지한 상태에서 내년 7월 1일이 된다면 그 피해는 결국 직원 전체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사측이 직종별 근무형태에 따른 대안을 제시한다고 해도 합의해줄 노측대표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경우 사측은 법 준수를 위해 불가피하게 초과되는 근로시간이 많은 직무부터 ‘외주화’를 검토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력충원으로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프리랜서, 비정규직 채용 등을 통해 법 준수를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보도, 드라마, 예능, 영상, 송출 등 방송 제작 현장에서 외주화가 진행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근로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를 통해 삶과 고용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도입하는 제도의 목적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저만이 아닌 방송노동현장을 아는 대부분 전문가들의 공통된 우려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막아내야 합니다. 근로기준법 개정의 목적대로 노동시간은 단축되어야 하며 불가피한 연장근로에 대해서는 법정 시간외 수당을 지급받아야 합니다. 부족한 인력은 비정규직이 아닌 정규직으로 채용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직원 과반으로 조직된 노동조합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복수노조 사업장에서 벌어지는 조합원 숫자 불리기 문제가 아닙니다. KBS에서 근무하는 모든 동료들의 근로환경 개선, 더 나아가 근로기준법 개정시행이후에도 “KBS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MBC와 SBS처럼 과반 노조가 있다면 노사 간 최대한 합리적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상태로 간다면 KBS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이 KBS본부노조와 다른 노조들이 그 문제만큼은 ‘공동교섭단’ 을 꾸리면 되는 것 아니냐”
하지만 법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또 이렇게 묻습니다.
“노동조합이 아니라 노사협의회가 있지 않느냐?”
역시 불가능합니다.
현재 노사협의회는 지난 2016년 6월에 구성돼 내년 6월 말까지 3년의 임기가 보장되는데 근로자 측 대표(이현진)가 임기 중 대표직을 상실한 상태여서 사용자측 10명, 근로자 측 9명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의결의 비대칭성이죠. 게다가 그 9명도 전임 노동조합에서 위촉된 상황이어서 사실상 활동이 불가능합니다. 사퇴한다고 해도 새 근로자위원은 과반노조의 대표자가 새로 선임해야 하는데 말씀 드린 대로 현재 권한을 갖는 과반노조는 없습니다. 즉 사측과 근로시간단축문제를 협의할 노사협의회도 운영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KBS본부 입장문 참고)
길어졌습니다. 결국 현재 무노조상태로 계시거나 본부노조가입을 원하시는 동료 분들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과반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앞으로 닥칠 불이익을 피할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올해 45기 신입사원 대부분이 본부노조에 가입한다고 계산해도 이백 여 명 정도가 부족한 상황입니다.
그동안 무노조 상태를 유지하신 분들의 입장은 충분히 존중합니다. 제대로 된 노조의 활동에 대한 불만이 크셨겠죠. 죄송합니다. 경중을 떠나 겸허히 수용하겠습니다. 지난 9년의 시절, 교섭권도 없이 활동하던 시절 KBS본부 노조가 걸어왔던 길에 대한 비판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부노조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결코 복지나 임금, 근로조건 개선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앞으로는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여 최선의 공통분모를 얻고자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KBS본부’가 당당한 KBS의 ‘제 1노조’라는 점을 말씀 드립니다. 올해는 비록 각 노조가 개별교섭을 하고 있지만 내년 1월 1일부터는 자연스럽게 개별교섭이 종료되고 저희가 교섭대표노조 자격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힘을 더 모아주십시오. 동료들의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함께 갑시다. KBS를 진정한 국민의 방송으로 돌려놓기 위한 길에 너와 나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혹시 여전히 불만족하시다면 그 비판과 지적은 같은 동지로서 말씀해 주십시오. KBS본부의 동지가 되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18년 6월 11일
KBS본부 위원장 이경호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