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노조의 탄생에서 총파업 투쟁까지 (1편)
새노조의 탄생에서 총파업 투쟁까지 (1편)
  •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 승인 2012.05.30 18:2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새노조의 탄생에서 총파업 투쟁까지


부당징계, 막장인사 분쇄 및 특보사장 퇴진 총파업 출정식 (2012.3.6.)

지난 3월 6일 언론노조 KBS본부는 ‘부당징계, 막장인사 분쇄 및 특보사장 퇴진’을 위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5월 24일이 80일째로, KBS 역사상 최장기 파업이자 사상초유의 언론사 총파업이 진행 중이다.

이번 파업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것은 올해 초 발발한 13명의 대량 부당징계와 이화섭 보도본부장 등의 인사였다.

사측은 올해 1월 30일 13명의 전직 노조 간부에게 정직 6개월 등의 중징계를 내렸다. 2010년 6월 이사회 방해, 2010년 7월 ‘불법’파업, 노보에 의한 명예훼손이 징계 사유였다. 2010년 7월의 단협쟁취 파업은 완벽한 합법파업이었고, 아직 이에 대한 법률적 판단도 내려지지 않은 상태인데도 사측은 일방적으로 이를 ‘불법’이라 규정하고 1년 반 전의 일을 다시 들고 나와 징계사유로 삼았다.

그리고 이틀 후인 2월 1일, 김인규 사장은 언론노조 KBS본부와 KBS노동조합이 공동으로 실시한 본부장 신임투표에서 재적 2/3 이상의 불신임을 얻어 보직해임된 고대영 본부장 후임으로 이화섭 부산총국장을 임명하는 등 그동안 불공정 방송, 인사전횡 논란의 당사자로 거론되던 사람들을 대거 국,본부장으로 임명하는 ‘막장인사’를 단행했다. 이화섭 본부장은 2010년 박재완 청와대수석의 논문 이중게재 단독보도를 불방시키고, <추적 60분> 4대강편을 2주간이나 불방시키는 등 KBS의 공정보도를 훼손한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보도본부장으로 임명되자 특히 기자들이 강력히 반발했고, 기자협회가 무기한 제작거부를 결의, 새노조가 파업에 들어가기 이틀 전에 제작거부에 돌입해 지금까지 진행 중이다.

부당징계와 막장인사가 연이어 발생하면서 조합원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2월 23일 끝난 총파업 찬반투표에서 88.6%의 조합원이 찬성표를 던져 3월 6일부터 파업이 시작됐다.

이렇게 파업의 도화선이 된 것은 부당징계와 막장인사였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2008년 8월 8일 사태 이후 낙하산 사장들이 자행한 탄압과 공정방송 파탄에 대한 그동안의 분노와 좌절감이 이를 계기로 폭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KBS 새노조의 파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KBS가 관제방송으로 전락한 과정과, 그 과정에서 새노조가 기존 노조에서 분리돼 탄압 속에서 싸우고 있는 이유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새노조는 왜, 어떻게 만들어졌나?

2003년 정연주 사장의 등장. 노동조합의 갈등이 시작되다.

KBS에는 크게 두 개의 노동조합이 있다. 하나는 2009년 말 새노조가 생기기 전의 기존 노조인 ‘KBS 노동조합’(기업별 노조. 위원장 최재훈)이고, 하나는 일명 ‘새노조’라 불리는, 민주노총 산하의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이다.

KBS에 노동조합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87년 6월 항쟁 이후인 1988년. 당시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흥사단 이사장 출신인 서영훈씨가 1988년에 KBS 사장에 임명됐다. 하지만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감이 증폭되는 상황에서 언론장악의 필요성을 절감한 노태우 정부는 1990년 3월 직원들에게 시간외 수당을 편법으로 과다 지급했다는 감사원의 표적감사를 이유로 서영훈 사장을 쫒아내고 청와대 대변인과 서울신문 사장 등을 역임한 서기원씨를 KBS 사장으로 임명한다. 2008년 정연주 사장이 쫒겨나고 이병순, 김인규 두 낙하산 사장이 들어오는 과정과 유사하다. 이에 저항해 KBS의 직원들은 제작거부에 돌입, 약 두 달 동안 KBS의 민주화를 위해 치열하게 투쟁했고, 결국 두 번에 걸친 경찰력 투입으로 싸움은 막을 내린다. 이것이 ‘90년 4월 방송 민주화 투쟁’이고, KBS 노동조합의 뿌리가 된 사건이다. 지금의 새노조는 90년 4월 투쟁의 유지를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


90년 4월 KBS 방송 민주화 투쟁

이후 김영삼 정부 때 홍두표, 김대중 정부 때 박권상씨가 KBS 사장으로 임명됐고, 방송의 민주화가 점차적으로 이뤄지면서(사실은 이뤄진 것처럼 보여진 것이지만) 노동조합은 대체적으로 큰 내부적인 분열 없이 유지가 돼 왔다.

그러나 2002년 12월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고 다음해 2월 정연주 사장이 임명되면서 이런 평온한 상태에는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동아일보 해직기자와 한겨레 신문 논설위원 출신인 정연주 사장은 제작현장에 최대한의 자율성을 부여하고 기존의 관료적인 인사체계를 개편하는 등의 개혁조치를 취했지만 내부적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기자, PD 등 취재, 제작부서의 역할이 강화되면서 전체 직원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기술 등 다른 직종의 소외감이 커져갔고, 팀제 실시로 보직을 잃게 된 시니어그룹들의 반발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2004년 12월 실시된 노동조합 선거에서 정연주사장에 대해 비판적 입장이었던 진종철씨(당시 KBS 안동방송의 엔지니어였던 그는 훗날 이병순, 김인규 사장 취임 이후 부장, 국장 등을 역임하며 KBS의 ‘실세’로 꼽히는 인물이다)가 제 10대 노동조합위원장으로 당선된다. 그와 정연주사장과의 갈등은 점점 커져갔고 (오마이뉴스 연재 [정연주의 증언] <'폭행사건' 주인공, 김인규 체제의 실세 진종철> 참고. http://bit.ly/KSmWeI ) KBS는 점차 소위 ‘친(親)정연주’와 ‘반(反)정연주’로 분열되기 시작한다.


정연주 사장과 진종철 노조위원장(왼쪽. 2005.4)

2008년 8.8 사태와 이병순 사장 입성

2006년 말 노조선거에서 전임 진종철 집행부와 같은 노선인 박승규씨가 ‘코드박살 복지대박’의 구호를 내걸고 11대 위원장에 당선되면서 KBS 내부는 극심하게 분열된다. 박승규 집행부는 임기 내내 정연주 사장 퇴진 투쟁을 전개했고, 2007년 말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하자 정연주 사장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노조 외에도 ‘PD협회 정상화 추진위원회’ 등의 단체들이 생겨나 정연주 사장의 퇴진을 추진했다. 반면 PD협회(협회장 양승동), 기자협회(협회장 김현석) 등은 현 시점에서의 정연주 사장 퇴진 운동은 곧 정권의 KBS 장악에 동조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박승규 노조 위원장 (2008.4. 당시는 언론노조를 탈퇴하기 전)

이명박 정권은 취임 직후부터 정연주 사장의 퇴진을 압박했으나 정연주 사장은 끝내 이를 거부한다. 그럴수록 정권의 퇴진 압박은 거세졌고, 조중동 신문은 정연주 사장에 대한 KBS 노동조합의 의혹제기를 집중 보도했다.

촛불시위 사태 후 정권은 본격적으로 방송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에 대한 수사가 시작됐고, KBS의 정연주 사장에 대한 감사원 감사가 착수됐다. 마침내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기 하루 전인 2008년 8월 8일 경찰이 KBS에 난입해 아수라장을 만들며 정연주 사장은 해임되고 만다. 이른바 ‘8.8 사태’다.정연주 사장이 해임되는 과정에서 침묵을 지키던 노조 집행부는 경찰력 투입이라는 뜻밖의 사태가 발생하자 박승규 위원장 등 집행부들이 민주광장에서 공권력 투입을 규탄하는 삭발식을 거행했으나 현장에 있던 사원들의 야유를 받았다. 분노한 700여명의 사원들이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사원행동’(공동대표 양승동 PD협회장, 김현석 기자협회장)을 결성했고, 이병순 사장 출근저지 투쟁에 나섰지만 결국 8월 27일 이병순 사장이 KBS에 입성한다.


8.8 사태 당시 사복경찰들에게 끌려나가는 김현석 기자(사원행동 대변인. 현재 새노조 위원장)


사원행동의 출근저지를 뚫고 KBS로 진입하는 이병순 사장(2008.8.27.)

박승규 노조 위원장은 이병순 사장이 KBS에 입성하자 본관건물에 걸었던 ‘낙하산 사장 반대’ 플래카드를 자진철거했고, ‘낙하산은 과학적 개념이 아니다’라며 이병순 사장의 취임을 용인했다. 그리고 그동안 갈등을 빚어왔던 언론노조(위원장 최상재)를 탈퇴해 ‘언론노조 KBS본부’에서 ‘KBS 노동조합’으로 이름을 바꿔 기업별 노조로 전환한다. 이후에도 ‘사원행동’과의 첨예한 갈등이 계속됐다.

이병순 사장은 정권의 KBS 장악에 저항했던 사람들을 대량으로 강제 전보를 보내는 등 이른바 ‘9.17 보복 인사 학살’을 감행했다. 지금 언론노조 이강택 위원장도 당시 의 PD였으나 이 9.17 인사로 비제작부서인 수원 연수원으로 전보됐다. 이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제작부서에서 비제작부서로, 서울에서 지역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보복인사 다음에 취해진 것은 비판적 프로그램에 대한 숙청이었다.

MBC 처럼 정권에게 눈의 가시 같은 존재였던 <시사 투나잇>과 <미디어 포커스>가 그 대상이었다. 이병순 사장은 취임사에서 “지금까지 대내외적으로 비판 받아온 프로그램,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도 변화하지 않은 프로그램은 존폐를 진지하게 검토하겠다”며 <시사 투나잇>과 <미디어 포커스>의 폐지를 기정사실화했다. 폐지가 가시화되자 PD(시사투나잇), 기자(미디어 포커스)들은 격분했고, 매일 피케팅이 벌어졌다.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11월 중순 개편에서 <시사 투나잇>은 <시사 360>으로, <미디어 포커스>는 <미디어 비평>으로 바뀌에 방송되게 됐다. 제목만 바꾼다고는 하지만 이것이 실질적으로 프로그램의 폐지를 의미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시사 360>은 사내 심의위원들의 악의적 심의에 시달리다 6개월 후 폐지돼 버렸다. <미디어 비평> 역시 예전의 예리한 비판기능을 상당부분 상실한 채 지금까지 명맥만 이어가고 있다.

<시사 투나잇>, <미디어 포커스>의 폐지와 함께 충격을 안겨준 것은 보도국 ‘탐사보도팀’의 폐지였다. 탐사보도팀은 그동안 권력, 공직자들의 비리 등을 가차없이 심층보도하며 수많은 특종을 했고, 각종 상을 휩쓰는 등 2000년대 중반부터 우리나라에 탐사보도가 활성화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런 성과로 당시 기자들의 자부심도 컸다. 하지만 이병순 사장은 이 탐사보도팀을 가차없이 해체하고, 팀장으로서 탐사보도팀의 중추적 역할을 해왔던 김용진 기자를 울산으로 발령을 냈다.


<시사투나잇>, <미디어포커스> 폐지 반대 집회 (2008.11.11.)

한편 이명박 대통령의 라디오 주례연설 강행 역시 내부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80년대 말 노태우 정권 당시 라디오에서 잠깐 대통령 주례연설 방송을 한 이후 20년 가까이 KBS에서 그런 방송이 나오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제 다시 대통령의 ‘옥음(玉音)방송’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라디오 PD 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고, 피케팅을 하고 라디오 위원회를 개최하며 반대를 했다. 하지만 결국 방송은 강행이 됐다.

그렇지만 노동조합은 침묵했다. 정연주 사장 때 <시사투나잇>이나 <미디어포커스>등이 정연주 사장 하의 KBS가 ‘편향’된 증거라고 주장해 왔던 노조가 이 프로그램들의 폐지에 같이 싸워줄 리는 만무했다. 이렇게 같은 조합 안에 있으면서도 대립적이었던 노조 집행부와 사원행동의 불안한 동거는 2009년 말 새노조가 출범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렇게 이병순 사장은 그동안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프로그램과 사람, 조직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하나하나 제거해나갔다. 그리고 진종철(10대 노조위원장), 이준안(11대 박승규 위원장 당시 언론노조 위원장에 당선됐다 탄핵. 8.8사태 이후 ‘KBS 정상화 비대위’ 공동대표), 최철호(진종철 위원장 당시 노조 사무처장), 윤동찬(90년대 말 PD협회장 출신. ‘PD협회정상화 추진협의회’활동), 오진규(‘KBS 정상화 비대위’ 공동대표), 박갑진(‘KBS 정상화 비대위’ 공동대표), 윤명식(‘KBS 공정방송노조’ 위원장)씨 등 전임 노조 간부 중심의, 정연주 사장 퇴진을 주도했던 사람들을 대거 국장 등 고위간부로 등용했다. 이들은 대부분 김인규 사장 취임 이후에도 여전히 사내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해 12월 실시된 노조위원장 선거는 KBS 뿐만 아니라 전국의 관심을 끌었다. 아직 촛불시위의 여진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KBS 노조 선거결과는 향후 MB정권의 언론장악이 순탄하게 이뤄지느냐, 아니면 어느 정도 제어될 것이냐를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였다.

하지만 사원행동이 지지하는 김영한 후보가 박승규 집행부의 부위원장 출신인 강동구 후보에 결선투표 끝에 66표 차이로 지게 된다. 이로서 정권의 KBS 장악에 맞서 싸울 마지막 보루마저 무너지게 되고 2008년을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의 열기는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새해가 되자 가장 우려했던 일이 마침내 현실화됐다. 이병순 사장은 2009년 1월 16일 사원행동 공동대표인 김현석 기자협회장과 양승동 PD협회장을 파면, 성재호 기자를 해임했다. 결국 재심이 열려 파면 해임사태만은 막을 수 있었으나, 이병순 사장은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을 계속해나가면서 KBS를 관제방송으로 만들어갔다.

하지만 이병순 사장은 그의 괴팍한 성격과 무조건 예산을 깍는 식의 저차원적 경영방식으로 사원행동 뿐만 아니라 전체 직원들의 인심을 잃게 된다. 그해 말 이병순 사장의 연임을 앞두고 노조가 전직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76.9%가 연임에 반대한다고 응답했다. 그는 결국 연임에 실패하고 1년 3개월 만에 사장자리에서 불명예스럽게 물러났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8대 집행부 본부장 박상현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공원로 13 KBS누리동 2층
  •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All rights reserved.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