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김광석 살해사건 일지
icon 도종환
icon 2017-10-03 21:48:11  |  icon 조회: 3625
첨부파일 : -
광주 5.18 ,82년 의령 학살,87년 대한항공 KAL기 폭파,가수 김광석 살해 사건일지
1979년 4월 서울대병원에서 신장이식이 필요한 만성신우염 진단을 받은 박정희와 딸 박근혜는 미국에서의 신장이식수술과 정권승계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준비절차에 착수한다. 박정희의 밀명을 받은 차지철 경호실장은 미국CIA와 출국작전의 밀약을 맺는다. 1979년 10월 26일 밤 9시를 기해 최규하국무총리,전두환보안사령관,정승화육군참모총장,김재규중앙정보부장,김계원비서실장,노태우,이희성등은 짜여진 각본에 따라 각자의 역할대로 작전에 돌입한다.10월27일 새벽3시 서울공항에서 박정희와 차지철경호실장, 경호원5명은 송별나온 전두환,허화평을 뒤로 하고 미군수송기를 타고 미국으로 향한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지시로 12,12사태를 공작하여 사실인 것 처럼 꾸민다. 박정희는 1980년 4월1일 밤12시에 메를린대학병원 수술실에서 차지철이 제공한 신장으로 이식 수술을 받고 다음 날 오전11시에 수술실에서 나온다. 공교롭게 재미교포 3세 리차드최가 수술외과 레지던트로 근무하고 있었다. 리차드최는 앞으로 5.18 광주진압작전이 끝 난 3개월 후 박정희의 수술부위의 이상유무를 진단하기 위해 서울에 온다. 신장주치의가 필요했던 박정희는 그 인연으로 딸 박근혜와 약혼을 종용한다. 그러나 리차드최와 박근혜는 성격차이가 심해 결국 결별하였다. 박근혜는 1974년 청와대 사저에서 박정희와 전두환의 케네디 암살에 대한 대화를 엿 듣는다. 전두환이 케네디를 암살한 자라는 것을 안 순간부터 전두환을 흠모하게 된다. 그 이 후로 박근혜는 전두환의 여자가 된다. 84년5월6일 밤10시에 전두환과 내연의 관계를 가져 임신 8개월된 박근혜는 서울대병원 초청교수로 입국한 리차드최를 병원 앞에서 납치하여 전두환의 소개로 당시 경기 광주군 오포읍 능평리에 있었던 장세동전안기부장 부인소유의 목재공장에서 정윤회와 함께 전기톱으로 살해하고 시신조각들을 인근 야산에 묻었다. 전두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박근혜는 딸아이를 출산하고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차지철에게 보내 기른다. 현재 엘리스 박이라는 이름으로 플로리다주 주검사로 재직하고 있다.
대한항공 여승무원 살해당하여 한강에 버려지다.
미국시각 80년 5월17일 정오쯤에 전두환으로부터 광주사태에 대해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급거귀국 결정을 하고 당일 밤10시20분 케네디공항 발 대한항공여객기의 취항을 취소시키고 경호원3명과 함께 서울로 회항하는 여객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한다. 82년 여름 기내 여승무원 2명은 박정희를 목격했다는 이유로 박정희의 지시를 받은 경호주임 이영도에게 약속장소인 서교호텔에서 납치되어 한강둔치에서 강간을 당한 후 양화대교에서 한명은 마취된 상태로 한명은 목졸라 살해당한 상태로 한강에 던져졌다. 그 당시에는 한강에서 밤부터 새벽까지 어업을 하는 어부들이 여럿이었다. 그 날 밤 시신2구가 떠내려 가는 것이 목격되어 어부 두명이 두시신을 건졌으나 한 시신은 입술과 목 등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고 눈이 치켜 떠 있어 무서워서 강에 버렸다. 이 시신은 며 칠 만에 다른 어부에 의해 강변 풀 숲에서 발견되어 파출소에 신고 된다. 시신 담당검사는 외관상 타살이 분명함에도 검시를 하지 않고 이영도에게 시신을 인도하였다. 당시 담당검사가 현국회의원 김동철이다. 이영도는 시신을 벽재골에서 화장하여 발견된 장소에서 뿌렸다. 한 시신은 어부가 거두어 풀숲에 3개월 동안 방치하다 여의도 한강둔치에 옮겨 놓고 갔다. 담당검사 정미홍에게서 이영도가 시신을 인도 받아갔다.
박정희 광주5.18에서 시위대를 총살하다.
한국시각 80년 5월19일 밤12시 광주공설운동장에 요란한 굉음을 내는 대통령전용헬기가 착륙한다. 헬기에서 박정희,전두환,박근혜,장세동이 내렸다. 박정희일행은 전남도청을 잠시 들러 도지사로부터 상황을 보고받고 전남대로 이동한다. 당시 도청에서 박정희 일행을 목격한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는 대한항공기 기내에서 19일 01시부터 실탄지급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전두환은 시위진압작전의 총사령관인 박정희를 총통각하로 예우하라고 지시하고 자신은 사령관각하로 불리운다. 박정희는 최규하대통령과 이희성계엄사령관에게 연락하여 20일 13시부터 육군지원단을 동원하여 헬기사격 명령을 포함한 공군작전명령을 내린다. 14시에 전일빌딩에 대한 헬기사격이 이루어진다. 20일 오후 박근혜는 발칸포 전차 사수자리에 앉아 발칸포총으로 도청에 있는 시민군을 겨누고 있었다. 목격자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일 밤9시경 전남도청 뒤에서 보초를 서는 시민군이 계엄군에 쏜 탄환이 박근혜의 어깨를 스치는 사고가 발생한다. 박근혜의 어깨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본 박정희는 분노에 휩싸여 그 이후로 시민군에 대한 총살을 명령한다. 대량학살의 시발점이 된 순간이었다. 총상을 입은 박근혜를 치료하기 위해 전남기독병원에서 의료진이 왔다. 기독병원 의료진의 증언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전두환은 그 순간을 옆에서 지켜봤다. 21일 아침 9시 전남대부근으로 계엄군을 쫓아온 시위대에 격분한 박정희는 검붉은 양복을 입은채로 M16소총으로 총알이 없는 칼빈총을 들고 도망하는 시위대에 조준사격을 하여 약30여명을 사살한다. 장세동은 박정희 옆에서 탄창을 준비하는 등 박정희를 보조했다. M16 소총을 소지한 검붉은 검은색 양복을 입은 5.60십대 키작은 남성의 인상착의를 한 박정희와 키작고 장교군복을 입은 장세동의 인상착의를 알리면 21일 아침 전남대 부근에서 이 들을 목격했던 목격자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한사람이 현 새에덴교회 담임인 소강석 목사이다. 당시 박정희에게 쫒긴 소목사는 죽은 척 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21일 오후부터 박정희는 도청 앞 탱크부대 선봉에서 소총을 어께에 매고 서 있었다. 목격자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는 이 날 저녁 양복이 시신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피범벅이 되어 옷을 평상복으로 갈아입는다. 광주교도소 외곽 가로수 옆에 매장한 시신은 11명이다. 전북 임실 1명이 포함되어있다. 91년 10월 최세창이 국방부장관 일 때 채굴하여 화장해 가로수 옆에 뿌렸다. 가로수 조경공사 명목으로 작업하였다. 교도소 근무자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21일 저녁 7시에 전두환 지휘하에 총살 당한 도청 앞 시민군의 시신 100여구를 광주 무등산 계곡에 암매장하고 자갈로 덮고 위에 바위를 얹어 놓았다. 매장하는 것을 본 목격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계엄군은 이 날 전남대부근에서 죽은 100여구의 시신을 전남대로 옮긴다. 시신들은 주민등록소지자 70여명과 미소지자 30여명이다. 이 중 3명은 타도 사람이었다. 경상남도 하동 부부2명, 충북 청주 1명이다. 사망자 명단은 최세창이 가지고 있다. 22일 새벽2시부터 박근혜와 최세창준장의 지시로 시신들을 벌목용 전동톱으로 절단하여 전남대 뒤 소각장에서 화염방사기로 약5시간에 걸쳐 소실한다. 전두환은 시신 소각 중 장세동에게 익은 살점을 떼어 오라고 한 다음 두어점을 입에 넣고 씹었다. 유학성은 그 광경을 보고 혼절하여 광주외곽 작전지로 도망간다. 함께 있었던 사람은 박근혜,유학성,정호용 등 이다. 그 시각 박정희는 전남대병원에서 오른쪽 옆구리의 스치는 총상을 치료 중이었다. 이 날 병원에서 군인들과 함께 온 5.60대의 남성을 본 목격자가 있을 것이다. 22일 아침 10시 최규하대통령이 박정희에게 인사 차 전남대를 방문한다. 박정희와 장세동은 부근 국밥집에서 식사를 하곤 하였다. 장세동은 박정희를 전남대청소부로 소개한다. 후일 안기부는 돈을 주고 국밥집 아주머니의 입을 단속하였다. 박정희는 3박4일의 작전수행을 하고 서울로 상경한다. 박근혜 탄핵 때 MBN 뉴스에서 방영된 녹음테이프의 대화자는 박정희, 김기춘, 최순실이다. 당시 박근혜는 박정희 옆에 앉아 있었다. 음성분석을 하면 알 것이다. 최태민은 94년5월에 죽은 것이 아니고 2001년 5월에 사망하였다. 사망신고를 하고 자신의 다락방에서 숨어살았다. 광주5.18 대표 일부 중에는 안기부(현국정원)의 돈에 매수된 사람들이 있다. 소위 민주변호사라 칭하는 자들 중에도 국정원으로부터 매월 돈을 받은 자들이 있다. 장유식 변호사가 대표적 인물이다. 신장이식을 다시받은 박정희는 회복을 못하고 92년1월 말 신당동 자택에서 숨을 마친다. 김재규는 박근혜의 경제적 도움으로 2016년 말까지 파리근교 세느강변 아파트에 살았었다. 차지철은 미국 플로리다주 육영수 자택 근처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김형욱도 근처에 살다 죽었다. 육영수는 73년 가을 자궁암을 진단 받았다. 74년 8월 15일 계엄선포의 구실과 도미수술을 하기위해 육영수 저격사건을 조작한 것이다. 저격범 문세광은 미국 오클랜드에서 살고 있다.
1987년 대한항공 KAL기 폭파범들
박근혜는 1987년 11월 26일 오후 2시경 당시 안기부(현국정원) 과장인 김무성과 김기춘 처럼 안기부에 검사로 파견되어 안기부 직원이 된 박주선과 함께 서울공항에서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이라크로 출발하였다.(현 국회의원 김무성과 박주선이다. 박근혜가 1982년부터 1987년까지 안기부 중견급 간부로 활동할 때 김무성과 박주선은 박근혜와 같은 팀원이었다. (김무성은 후일 삼풍백화점 지하주차장에 C4폭탄을 설치하여 삼풍백화점을 붕괴시켰다. 붕괴시 발굴현장 검사였던 정미홍이 건물 잔해 속에서 검은 상자에 담긴 불발된 C4폭탄을 발견하였으나 안기부에 넘겼다.) 호텔에서 숙박하고 다음 날 27이 아침 10시경 김무성과 박주선이 대사관에 가서 외교행랑편으로 배달된 폭파장치를 확인하고 호텔로 가져왔다. 28일 밤10시경 김무성은 안전점검 구실로 바그다드 공항에서 이륙점검 중인 대한항공 여객기에 들어가 기내 오른 쪽 끝부분에 C4시한폭탄 200그램을 설치하였다. 박주선은 공항 내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KAL기 잔해물 수거 당시 동체 뒷 부분 파편조각은 폭파로 분산되어 찾을 수가 없었다. 87년 11월 27일 이라크 대사관에 근무하였던 직원들과 여권연장 하기위해 대사관에 온 해외건설회사 조무과 직원들의 김무성과 박주선에 대한 목격증언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29일 KAL기 폭파 직 후인 오후2시 30분 경 박근혜는 바그다드 공항 면세품 매장에서 시계를 사다가 한국의 정세에 예의 주시 중인 미국CIA에게 연행되어 바그다드 미대사관에서 3일간 조사받다가 바그다드 CIA지부장에게 미화 5만불을 주고 풀려났다. 박근혜는 후일 자신이 KAL기 폭파범으로 지목될 것을 염려하여 정부 기밀문서에 북괴 공작원에게 납치되어 북한대사관에 감금됐다가 풀려났다고 기록하여 두었다. 사고 직후 바그다드에서 박근혜 일행의 동선이 입에 오르내리자 급격히 박정희가 북에 전통문을 보내 미화6000만불로 김현희가 폭파한 걸로 조작하였던 것이다. 당시 KAL기 폭파 특별수사본부 주임검사가 현국회의원 홍준표였다. 일본 오사카 조총련간부의 딸인 김현희(본명 최수지)는 북한 공작원으로 둔갑되어 주일영사관을 통해 안기부 정직원 차명진(전국회의원)과 함께 한국에 온다. 오사카 현지에 가면 최수지를 아는 사람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김현희는 현재 오사카에 거주중이다. 국정원 정부 기밀문서에는 미군전투기가 여객기를 교전 중인 미그기로 오인하고 오폭하였다고 기록 되어있다. 국정원 정부 기밀문서에는 자신들의 범죄를 은폐하거나 자신들의 치적을 남기기 위해 기밀문서라는 이름으로 거짓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82년 101경비대 의령 마을 주민 학살(우순경사건)과 96년 가수 김광석 살인사건
전두환 아버지는 1929년부터 1935년 전두환이 5살까지 7년 동안 경남 합천에서 가까운 의령군 궁류면으로 일본순사로 출퇴근 하였다. 전두환 가족은 궁류면 원당리에서 2년 살았었다. 뇌물 수수로 파직당했다. 조선총독부 경시청 기록문서로 일본에 보관되어 있다. 81년 아웅산 묘지 폭발사건 후 의령에서 전두환 아버지가 일본 순사였다 라는 소문이 돌자 전두환은 박정희의 밀명을 받아 시끄러운 장영자 사태를 진정시키고 소문의 근원지를 척결할 목적으로 허화평 지휘하에 안기부(현국정원) 간부 박주선, 보안사(현기무사)진창수원사, 밀약으로 월남한 강명도(본명:강창명은 94년 세상에 드러날 때까지 남한에서 투명인간으로 살았다.)와 청와대 101경비대 중에서 3명을 착출하여 이들로 하여금 마을 주민을 학살하게 한다. 82년 4월 26일 저녁7시 경남 합천군 고령면 여관에 들어간 자들은 우순경과 경비대 3명이다. 수사기록에 여관 주인과 여관 앞 정육점 사장의 4명에 대한 증언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밤9시에 여관에서 나와 각자 작전지로 이동한다. 박주선과 2명은 인근 자동차 안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밤9시에 이동하였다. 인근에서 인민군 복장으로 갈아입고 위장을 칠하고 북한군이 사용하는 AK소총으로 무장하였다. 이 날 마을 주민 90여명이 잠든 중에 북한군이 사용하는 AK소총과 수류탄으로 학살 당한다. 사망자수가 많다는 이유로 노인은 사망자수에 포함하지 않았다. 인민군 복장을 한 우순경이 밤9시 30분 경에 궁류면 읍내에서 학살을 한다. 궁류면 예비군 중대 행정실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있던 방위병들이 목격하였다. 마을에서 학살을 한 101경비대 3명 중 1인이 현경찰청장 이철성이다. 당시 이철성은 이순자의 가까운 인척으로 101경비대에 배치받았다. 101경비대 소속이었 던 우순경은 정보수집 하기위해 상부지시로 의령으로 근무지를 옮겼 던 것이다. 101경비대 2명은 암살당하였다. 사망자수가 많아 북괴와 전쟁상황으로 이어질 것을 염려한 전두환의 지시로 북한 무장공비의 폭난이 아닌 우순경 단독범행으로 종결하였다. 정부 기밀문서에는 북한 무장공비가 학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004년 봄 진수창이 당시 민주당 간사인 정세균과 추미애을 찾아가 사건 전말을 실토하였으나 정세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해 가을에 진수창은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전두환이 대구로 이사와 서문시장 옆에서 살았 던 어린시절 소학교 2학년 때 전두환의 친아버지는 병이나고 매일 징징대며 가출한 어머니를 찾는 전두환의 바로 아래 남동생을 몽둥이로 때려 죽인 다음 시신의 일부를 떼어 석탄불에 구워서 고기달라고 떼쓰는 전두환에게 주어 먹게 하였다. 대구 서문시장 옆에서 살았고 전두환 여동생의 친구였 던 가수 김광석의 아버지가(당시 소학교1학년) 전두환 집에 놀러 갔다가 몽둥이로 때려 죽이는 광경을 보고 놀라 도망나왔다. 95년부터 어린시절 두환의 아버지가 자식을 몽둥이로 때려 죽이는 것을 보았다는 것을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들은 김광석이 지인들에게 이야기하고 다닌다는 것을 들은 이순자는 분노했다. 96년 1월 5일 오후 1시경 김광석과 알게된지 5년 된 전두환의 아들 전재용이 김광석 집에 확인 전화를 한다. 광석과 말다툼을 하고 강화도로 가려는 부인 서해순이 전화를 받았다. 오후 3시경 광석의 부인과 오빠 가족이 차를 타고 집을 나왔다. 길가 차에서 과일 파는 아저씨와 동네주민 2명이 목격했다. 광석의 가족이 집을 떠나는 것을 본 전재용은 밤 9시경 경호원2명과 광석의 집을 방문하였다. 맥주를 마시다가 밤 10시경에 말다툼 끝에 전재용의 폭행하라는 사인을 살해하라는 것으로 착각한 경호원이 김광석의 목을 비틀어 죽였다. 저항할 틈이 없었다. 특전사에서 살인 기술을 교육받은 경호원이었다. 자살로 위장했다. 부검 검안서에 시신의 경추가 틀어져 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서해순과 그녀의 오빠는 새벽 3시 50분경에 집에 돌아 왔다. 아침 9시경 전두환의 부인 이순자는 서해순에게 전화한다. "우리가 처리 할테니까 잠자코 있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가족을 몰살 시키겠다." 고 말했다. 이순자는 오전 10시경 마포서장에게 전화를 해 사건 정리를 지시한다. 당시 마포서장의 증언을 들어라. 2007년 12월 19일 오후3시 학교에서 집에 돌아온 김광석의 딸 김서연이 서해순이 애인 이0성과 안방침대에서 나란히 발가벗고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부정행위로 인하여 상속이 문제될까 염려한 서해순이 12월 20일 오후 5시 강남구청 옆에 있는 커피숖에서 성남 월드파 두목과 5억에 청부살인 거래를 하였다. 서해순의 기업은행 통장에서 5억원이 계좌이체 된 것을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2007년 12월 23일 오후 5시경 서해순의 아파트에 택배기사로 가장한 모자쓴 괴한 2명이 침입하여 혼자있는 광석의 딸을 목을 비틀어 살해하고 도망하였다. 2명 중1인은 해병대 출신인 월드파 조직원 김형진이다. 그는 현재 원정 도박사이트로 태국에 도피 중이다. 서해순은 저녁 9시에 집에 왔다. 병원에서 딸을 사망선고한 의사가 목 뒤쪽에 뼈가 볼록 튀어나온 것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김형진과 눈이 마주친 엘리베이터를 같이 탄 목격자 2명 중 1명은 범인들과 같은 층에서 내렸다. 수소문하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두환 케네디를 암살하다.
1962년 봄 미국 방문시 만찬자리에서 케네디로부터 "당신은 앞으로 독재자가 될거야" 라는 말을 들은 박정희는 그 때부터 케네디를 원수로 간주하였다. 1962년 가을 미국대통령 캐네디는 평소 한국의 군사정권에 부정적이었는데 박정희가 자작극으로 미국놈들에게 암살 당할 뻔 했다고 허소문을 퍼뜨리자 이에 분개하여 박정희 제거작전을 실행하려고 하였다. 당시 서울 CIA지국장은 박정희에게 돈으로 매수당한 관계로 케네디의 계획을 알려준다. 박정희는 가까스로 생명의 위기를 모면한다. 이 일로 박정희는 피의 복수를 결심한다. 박정희는 그 후 여러번 CIA 서울지국장에게 자신이 언젠가는 케네디를 암살하겠다고 말한다. 1963년 대통령이 된 후로도 케네디로부터 차가운 시선을 받자 CIA 지국장의 인연으로 존슨 부통령 세력과 결탁한다. 정치적 스캔들로 입지가 좁아지는 케네디의 정적이었던 존슨은 미국내 국토안전부 요원으로 암살작전을 하면 비밀이 들통날 위험이 크다고 판단하여 외부인 청부살인을 선택한다. 청부살인은 범인, 증거, 배후자를 찾기 어려운 장점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54년간 진범과 그 배후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존슨은 박정희를 청부살인업자로 선택한다. 전두환소령,김종필전중앙정보부장,김형욱중앙정보부장 3명은 홍콩시각 21일 아침10시 홍콩 주재 미국대사관에서 에드가 후버에게 받은 위조 여권으로 홍콩을 출발하여 에드가 후버와 함께 미국 시애틀 공항에 도착한다. 김종필은 작전이 발각되기를 원해 공항에서 홍콩으로 출발하기 전 영국대사관에 케네디의 암살 음모가 있으므로 케네디의 신변보호를 요청하였다. 영국대사관은 본국에 연락해 조치를 취한다. 영국정보국 MI6는 에드가 후버가 홍콩 미대사관에 들어간 것을 상부에 보고한다. 케네디의 텍사스 방문에 맞추어 1963년 11월 22일 오전 9시 에드가 후버측이 지정한 warehous building 1층 로비 바로 옆 빈사무실을 저격공간으로 정한다. 이 건물은 보세창고로 쓰이고 있었다. 미국측은 저격용 MCK소총 1자루, 무장용 M16소총 2자루를 준다. 탄알은 저격용MCK 5발, M16은 실탄1 발 다음 공포탄1발 씩 탄창에 장착되어 있었다. 만약 들통이 나 교전할 때 사상자 수를 줄이기 위한 미국의 술수였다. 22일 오전 11시 쯤 warehouse builing 1층 저격장소에서 김종필이 작전 선임자로 자신이 총을 격발하겠다고 하였다. 김형욱은 사무실 밖 출입문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케네디의 퍼레이드 녹화영상에서 1층 사무실 창문이 조금 열려 있고 두개의 점으로 보이는 두개의 총구를 스쳐 지나가는 장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김종필은 미국측이 저격용소총으로 저격하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무장용으로 준 신형 M16소총으로 1,2,3발을 격발한다. 뒤에 저격용소총의 격발소리와 다르게 들리는 이유이다. 1발은 보도블록 가장자리에 맞아 튕겨나가고 2발째는 공포탄으로 소리만 들린다. 3발째는 케네디가 탑승한 차의 뒷바퀴에 맞는다. 후에 김종필은 미국 대통령을 저격하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해 빗겨 쏘아 경호원들이 케네디를 보호해 작전이 실패하기를 원해서 그랬다고 한다. slow capture 영상으로 자세히 보면 M16소총의 짧은 탄두가 잡힐 것이다. 수사과정에서 길이가 짧은 M16탄두 2개가 발견된다. 일반인에 공개 되지 않은 사항이다. 김종필 옆에서 저격용소총으로 조준하고 있던 전두환은 김종필이 실패하자 재빠르게 조준 격발하여 4발과 5발째의 총성의 총알이 케네디의 목과 후두를 관통한다. 이 때 저격장소인 1층 로비 옆 사무실 창문에서 전두환의 총의 총구에서 뿜어나오는 장약불이 TV카메라 영상에 스쳐 잡힌 것을 볼 수 있다. MCK는 MK소총을 개량한 조준경을 장착한 저격용소총이며 탄알도 살상력이 크게 개량된 저격용 탄두였다. 저격명령은 케네디대통령이 엘름가를 지날 때 검은 우산을 쓴 이가 우산을 올리면 저격이라는 신호였다. 이 사내는 존슨부통령으로부터 손짓으로 저격명령 사인을 받는다. 박정희는 후 일 이일로 전두환을 한국의 대통령으로 만든다. 케네디의 저격순간 영상을 slow capture로 보면 5발째 탄환이 뒤에서 날아와 후두를 관통하기 직전 일반탄두의 길이 보다 긴 형태의 검은 물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4발째 탄환이 목을 관통하기 직전 탄두형태의 물체도 slow capture 영상에 잡힌다. 제2의 저격수가 잔디언덕에서 발사하였다는 가설은 맞지 않다는 증거다. 미국측은 M16소총의 탄두로 인하여 미국군이 개입됬다는 의혹을 없애려고 남 모르게 일반 탄두보다 긴 저격용탄두를 누워있는 코넬주지사 옆에 놓았던 것이다. 케네디가 쓰러지자 군중 속에 있던 요원이 교과서 창고건물에서 총소리가 났다고 소리지른다. 모든 경호원과 경찰이 건물을 애워 싼다. 이 때 옆 건물에 있었던 김종필 일행은 뒤 문으로 어려움 없이 빠져나간다. 그러나 1층 창문이 조금 열려있고 총소리를 의심한 한 여성이 후문으로 나오는 전두환 일행과 눈이 마주치자 전두환은 즉시 그 여성을 목졸라 살해하고 창고 안쪽 보이지 않는 곳에 놓고 달아났다. 이 여성은 후버일행을 미행한 영국정보국 MI6요원이었다. 이틀 후에 시신이 발견되고 4일 후에 창녀가 지나가는 행인에 의해 살해 당한 것으로 언론에 보도된다. 전두환과 김형욱은 갈색가발과 썬글라스를 쓰고 배낭가방을 들고 다녔으며 키 큰 김종필은 갈색 점퍼를 입고 있었다. 미국시각 21일 밤10시에 휴스턴에서 하루 숙박을 했기 때문에 휴스턴 호텔에서 이들을 보았다는 목격자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969년 박정희의 영국 국빈방문 때 박정희가 묶는 방의 화장실에 똥이 있는 외교적 결례를 한다. 케네디 암살과 자국의 정보요원 사망에 대한 묵시적 항의였다. 이 때부터 박정희는 국제외교가에서 암묵적으로 케네디 암살범으로 지목되어 활동이 위축된다. 딸 박근혜대통령이 영국방문시 화장실의 변기를 교체한 이유가 여기 있다. 텍사스주 달라스경찰 부국장은 숨진 여성에 대하여 수사하는 과정에서 warehouse building1층 빈사무실에 들렀다가 거기에서 화약냄새가 나는 것이 수상하여 상부에 보고하자 4일 후 실종한다. 에드가 후버의 지시로 살해당했다. 교과서 창고건물에서의 암살 범인으로 지목된 오스왈드는 에드가 후버에게 매수되어 안전가옥에서 대기 중에 있었다. 자신의 말대로 조기 사건종결을 위한 희생양으로 살해당한다. 1963년 11월 26일 밤 10시 부루클린 공항(현케네디공항)에서 이들을 추적한 CIA요원들에게 붙들려 공항 유치장에 3일간 억류 당한다. 여권에 있는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위조여권이 들통나 한국인이라는 것이 발각되고 5발이 장착된 소총에서 2발을 사용하고 남은 3발 중 기념으로 전두환의 호주머니에 넣은 1발을 압수당했다. 전두환과 일행은 "우리는 대한민국 정부요원이다." 라고 말한다 김종필은 미국CIA에 협조를 요청해 반역하고 도망 중인 요원에 대한 동맹국의 작전 중이라고 임시답변하였다. 존슨대통령의 특명으로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미국CIA는 현재도 이 3명의 아시아계 용의자 신상에 관한 기록 부분은 공개하지 않고 기밀에 붙이고 있다. 전두환은 부루클린 공항경찰대에 '미스터 전'으로 기록되어 남아있다. 전두환은 탄알을 반환 받아 집에 가져와 장롱속에 보관하고 있다. 술자리에서 가끔 그 탄알에 대하여 무용담으로 자랑하곤 하였다. 외국인 암살자 전두환과 암살을 명령한자의 딸 박근혜와 혼외관계에서 난 자식 '엘리스 박'이 미국 플로리다주 주검사로 재직하고 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한 일 이 아닐 수 없다.
2017-10-03 21:48:11
1.216.54.20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히버니 2021-10-10 00:16:27
셀틱의 감독인 앤제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라이언 크리스티를 잔류시키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재계약에 대한 협상을 진행할 것이다(데일리 레코드)



리빙스톤의 감독인 데이비드 마틴데일은 [ http://sss.aaoouu.com ] 버밍엄의 미드필더 오딘 베일리 임대가 가까워졌다고 말했다(스코츠맨)



페예노르트는 헤렌벤의 플레이메이커인 조이 베어만에 대해 아직 가격을 책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여름에 레인저스와도 연결됐었다(스코티시 선)



셀틱의 공격수 오드손 에두아르는 어제 던디와의 [ http://ttt.aaoouu.com ] 경기를 치룬 후 5명 씩 모여서 진행하는 트레이닝 세션에서 발목 부상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스코티시 선)



로스 카운티의 감독인 말리 맥카이 감독은 이번 이적 시장이 끝나기 전에 4명의 새로운 선수를 영입할 것이라고 말했다(프레스 앤드 저널)



세인트 존스톤의 감독인 칼럼 데이비

부스케 2021-09-26 16:31:27
테코 모디세는 남아공 축구의 가장 사설토토위대한 사상가이자 테크니션 중 한 명으로 라리가를 축구 아티스트를 위한 세계 최고의 리그로 생각한다



"스페인 축구는 키가 꼭 크거나 강한 힘이 필요하지 않지만 매우 영리하고 지능적인 리그입니다"





또한 그는 2009년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 http://eee.vivinix.com ] 느낀 점을 이야기했다.



"2009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사설토토스페인전은 인생에서 가장 교육적인 경기였습니다.

경기를 보고 분석하는 것과 실제로 상대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죠.

그날은 가장 어렵고 좌절감을 줬던 게임 중 하나로, 그들은 생각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 인혜, 부스케츠, 사비, 알론소, 다비드 실바가 [ http://ggg.vivinix.com ] 스쿼드에 있던 스페인은 단순한 축구를 할 줄 알면서도 매우 기술적이며 템포를 조절할 수 있었어요"

"언제 어떻게 패

코비치 2021-09-26 07:21:27
레알 마드리드는 이번 여름 새 시즌을 안전놀이터 순위 앞두고 스쿼드를 축소하려고 있으며 쿠보는 임대로 팀을 떠날 것이다.



일본의 스타는 그의 국가대표팀에서 인상적인 [ http://aaa.aaoouu.com ] 활약으로 올림픽을 마치고 라리가 클럽은 물론 유럽 전역의 클럽에서 관심을 받고 있다.



마요르카와 레알 소시에다드는 이 미드필더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 쿠보가 가장 선호하는 클럽은 마요르카다. 쿠보는 2019-20 시즌 마요르카에서 성공적인 임대 생활을 보냈으며 35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기록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마르틴 외데고르를 레알 소시에다드로 보낸적이 있으며 레알 마드리드는 쿠보를 레알 소시에다드로 보내는것을 선호 할 것이며 다음 시즌 소시에다드는 유로파리그에 출전하기 때문에 클럽은 선수가 발전할 좋은 기회로 볼 것이다.



쿠보의 임대이적은 재정에도 도움을 줄거다. 따라서 잠재적인 거래에서 마요르카를 보류할 수도 있다.

로트위 2021-09-19 16:20:17
레알 마드리드는 카세미루와 [ http://toto13.xyz ] 이스코의 골로 승인전화없는 안전놀이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2-1로 이겼습니다.



레알 마드리드는 4번째 UEFA 슈퍼컵을 획득한 후 4년이 지났습니다. 2017년 8월 8일 우리 팀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 아레나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꺽었습니다. 카세미루와 이스코의 골 덕분에 UEFA 슈퍼컵을 우승했습니다.



지단의 부하들은 카세미루의 골로 리드를 잡았고 후반 초반 이스코의 골로 격차를 벌렸습니다. 루카쿠가 62분 골을 넣었지만 결국 레알 마드리드가 2-1로 이겼습니다. 이 승리로 레알 마드리드는 2년 연속 UEFA 슈퍼컵을 우승했습니다.



레알 마드리드

나바스,[ http://toto14.xyz ] 카르바할,라모스,승인전화없는 토토사이트,바란,마르셀루,카세미루,모드리치,이스코 (아센시오 74),크로스,베일 (바스케스 74),벤제마 (호날두 83)



맨체스

로마 2021-09-12 08:41:43
로마의 감독인 무리뉴는 레알 베티스와의 친선 경기에서 퇴장당하였습니다.



스페셜원은 자신의 의견을 항상 솔직하게 [ http://toto7.xyz ] 하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정도가 지나쳤습니다. 그는 미드필더는 로렌초 페예그리니와 함께 필드 위로 올라가 항의를 하다가 같이 퇴장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5대리그 중 스페인이 제일 사이즈 작은 국가라 그런가
코로나 대문에 프로리그가 제일 휘철거리는 거 같음
작년 이적시장 지출도 리그앙에 밀릴 정도로 긴축 재정했다는데
선수 등록 못하고 이적자금 말라붙은 구단 쏟아져 나옴
경기가 2대2로 비등비등한 상황에서 알렉스 모레노는 베티스의 3번째 골을 넣으며 팀의 결승골을 넣었습니다.



로마의 수비의 헤딩 실수로 공이 골대를 맞고 알렉스 모레노에게 떨어졌는데 모레노는 다이빙 헤더를 하는 과정에서 왼쪽 팔을 사용하여 골을 넣은 듯 했습니다. 심판은 골을 인정하였고 무리뉴는 이에 항의를 하다가 퇴장을 당하였습니

  •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8대 집행부 본부장 박상현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공원로 13 KBS누리동 2층
  •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All rights reserved.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