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윤의 고함소리] 87년, KBS에 부는 민주화 바람
[현상윤의 고함소리] 87년, KBS에 부는 민주화 바람
  •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 승인 2015.06.04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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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윤의 고함소리 5화
오랜만에 다시 연재를 이어갑니다. 지난 6개월 편집자의 게으름으로 인해 연재가 중단되었던 점을 조합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연재는 앞으로 3회 정도 더 해 7회로 마감할 예정입니다. 이번 5회에서는 87년 민주화의 열기가 PD협회 창설로 이어진 이야기, 그리고 6회와 7회는 90년 4월 투쟁을 다룰 예정입니다. 너무 오랜만의 연재라 이야기가 어디서 중단되었는지 기억이 안나시죠? 4회는 현상윤 PD가 MBC의 <방송민주화투쟁 선언문> 팩스를 우연히 받고 이걸 복사해 회사에 뿌렸던 이야기였습니다. 그럼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편집자주>

 

지금 신관 주차장 자리에 ABC 가건물이 있었는데 거기에 PD들이 모인거야.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어. 100명 가까이 모인 거 같아. 근데 다들 두려움이 떠는 게 느껴져. 딱 보면 느껴지는 거 있잖아. 사람들이 다 얼굴이 벌겋게 되가지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고. 근데 그러면서도 발언하는 이야기는 굉장히 강경했어. 일단 고해성사부터 하는 거지. ‘나는 이런 식의 관제 방송도 해봤다.’ 막 이런 고해성사들이 나오고 또 다른 사람들은 ‘독재정권을 타도해야 한다.’ ‘기회주의적 간부들을 몰아내자.’ 이런 식의 성토까지 나왔다고. 두려움에 떨면서도 할 말을 다 하는 그런 자리였던 거지. 긴장감이 팽팽하게 넘치고 난 정말 감동적이더라구. KBS에서 그런 식의 자성과 비판적 발언이 집단적으로 터져 나온 건 처음 있었던 일이야. 그런 토론이 거의 밤새 이루어졌어. 그리고 마지막에는 더 많은 PD들을 모아서 총회를 다시 열자는 결론이 내려졌어.

 

87년 7월의 일이다. 당시 한국사회는 그야말로 격변기였다. 민주화 투쟁의 열망이 들끓고 있었고, 6.29 선언이 나온 직후라 정권교체를 의심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노동계에서는 노조 설립이 유행처럼 퍼지고 있었다. MBC에서도 기자들을 중심으로 노조 설립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 비하면 KBS는 한참 늦게 출발한 셈이다. 하지만 회사는 이 뒤늦은 출발조차 가만히 두지 않았다.

 

2차 모임을 갖기로 한 날이 토요일이었어. 그때는 토요일도 근무를 했으니까. 근데 그날 오전에 전화 한 통이 왔는데 어떤 사람이 날 좀 보자는 거야. 그래서 본관 커피숍에서 만났어. 근데 다짜고짜 자기가 고등학교 선배라는 거야. 알고 봤더니 이 사람이 인사부장이야. 내가 명동성당 들어가 있을 때 사장이 전화로 소리를 지르면서 이랬다는 거야. ‘현상윤이가 누구야? 그 새끼 인사파일 가지고 얼른 뛰어 와!’ 그래서 정신없이 내 인사파일 가지고 올라가면서 봤다는 거야. 아무튼 그 인사부장이 자기가 고등학교 선배라면서 술을 막 먹여. 그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아무튼 결론이 뭐였나면 ‘오늘 모임에 가지 마라.’였어. 그러니까 회사에서 작업을 시작한 거지. 발언 세게 하고 목소리 크고 그런 사람들을 회유한 거지. 근데 뭐 그렇다고 내가 안 가나? 갔지. 근데 가보니까 분위기가 다른 거야. 1차 모임하고는 뭔가 분위기가 달라.

 

때는 1987년 7월 18일 토요일이었고 참석자는 139명이었다. 어떻게 보면 대단한 일이지만 달리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전 직종이 참여한 것도 아니고 전체 직원 수에 비하면 참석 인원도 얼마 안 된다. 하지만 이날 모임은 향후 KBS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뜨거운 마음이야 참석자들이 훨씬 더 커겠지만 모임의 중요성은 회사가 더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회사의 발 빠른 회유 작업은 모임의 방향성을 바꾸어 놓는다.

 

1차 모임보다 톤이 확 떨어졌어. 1차 모임이 뭔가 뜨거웠다면 2차 모임은 차분해진 거야. 그리고 공채 1기 선배들이 말을 많이 하더라고. 선배들 발언권이 커진 거지. 나쁘게 말하면 회사의 회유 작업이 통한 거야. 그러면서 논의는 자연스럽게 PD협회 설립 쪽으로 기울어지는 거고... 그때 논의가 노조 설립으로 갈 수도 있었던 거거든. 근데 사실 그때는 사람들이 노동조합이 뭔지도 모르긴 했어. 나만해도 뭐 대학 때 노동운동을 했던 것도 아니고 노동계 사람들하고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노조가 뭔지도 몰랐어. 생각해보면 참 우리가 바보같은 거야. 그때 외부에서는 노조 설립이 한창이었는데 방송사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도 몰랐던 거지.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신문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하니까.. 그러니까 노조 설립 이런 건 생각도 못하고 선배들이 PD협회 만들자고 하니까 그냥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간 거지.

 

1987년 당시 '여의도 광장'시절의 KBS 본관과 신관

회사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방송 민주화에 대한 열망, 그 커다란 흐름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노조 설립만큼은 막아야 한다. 그래서 KBS에서 처음으로 집단화된 변화의 목소리를 노조가 아닌 협회 설립으로 유도한 것이다. 그럼 협회 설립으로 이어진 2차 모임은 실패한 것인가? 당시 총회에서 온건한 목소리를 냈던 선배들은 회사의 사주를 받은 프락치인가? 이것에 대한 평가는 각자 다를 수 있다. 현상윤 피디의 평가는 이렇다.

 

2차 모임할 때 선후배들 사이에 의견차가 있었지. 노조 설립을 주장하고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가 더 세게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런 후배 그룹이 분명히 있었지. 뭐 강경파라면 강경파라고 할 수 있겠지. 근데 아무튼 결론은 선배들이 원하는 쪽으로 간 것인데... 그게 사실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어쩌면 보다 현명하고 현실적인 방법이었던 것일 수도 있어. 그래도 어째든 협회라도 만들 수 있었던 거잖아. 그 전에도 PD협회를 만들려고 하는 시도가 두 번 정도 있었대. 근데 그때마다 안기부랑 회사가 방해해서 실패했던 거지. 근데 어째든 협회를 만들었잖아. 그리고 PD협회가 생기고 나니까 다른 협회들도 연달아서 막 생겨났거든. 그만큼 회사에 집단적인 목소리가 많아지는 거고. 그러니까 그때 ‘노조가 아니라 협회를 만든 것은 실패다’라고 딱 잘라 말하는 기가 좀 어렵지.

 

7월 20일 협회장도 없는 상태에서 PD협회가 창설된다. 7월 17일 첫 모임을 가진지 3일만이다. 이어서 기술인협회, 아나운서협회, 경영협회가 연달아 생긴다. 노조는 아니었지만 KBS의 노동자들에게 공식적인 힘이 생긴 것이다. 협회들이 나서 처음으로 한 일이 ‘특채자 청산’문제였다. 회사와의 공방 끝에 3명의 특채자가 회사에서 쫓겨난다. 그 중 한명이 현재 박지만의 EG그룹에서 부회장을 맡고 있는 이광형이다. 나름대로 협회가 열심히 활동하던 시절 현상윤 PD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난 협회에서 아무것도 안 시켜 주더라고, 하하. 그래서 뭐 현업을 열심히 했지. 근데 회사에서 목포로 지방 발령을 내는 거야. 그때 피디들 몇몇이 지방발령을 받았는데, 그러니까 반골들을 지방으로 돌린 거지. 그런데 88년에 올림픽이 있었잖아. 6개월만에 불러 올리더라고. 올림픽 방송을 하려니까 본사에도 사람이 모자라잖아. 사실 우리 11기가 올림픽 요원으로 뽑힌 사람들이거든. 그래서 6개월 만에 올라와서 첫 출근을 하는데 어떤 선배가 나를 붙잡더니 ‘잘 됐다. 니가 이거 해라.’ 하는 거야. 그래서 뭔가 했더니 그 날이 노조 발기인 대회더라고. 올라오자마자 노조 발기인대회에 참석한 거지, 허허.

 

현상윤 PD가 잠시 속세(?)를 떠나있던 시절 KBS에도 바야흐로 노조 설립이 준비되고 있었다. 다음 6회에서는 노조 설립과 90년 4월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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