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인명 사전에 실린 백선엽 예비역대장
친일인명 사전에 실린 백선엽 예비역대장
  •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 승인 2011.05.2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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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노보에서 밝힌 대로 KBS에서는 6.25 특집으로 친일파 출신인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특집 다큐멘터리가 준비중에 있습니다. 언론노조 KBS 본부는 <이승만 특집>이 강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친일 경력 인사를 영웅시하는 프로그램을 내보내는 것은 친일을 미화한다는 비난을 자초할 우려가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다음주 공정방송위원회에서는 이 문제를 다룰 예정입니다.

백선엽 예비역 대장에 관해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내용을 옮겨왔습니다. 그가 과연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는데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백선엽 白善燁 1920∼

만주국군 중위·간도특설대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다. 1939년 3월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했다. 만주국이 초급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펑톈(奉天)에 세운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에 1940년 3월 입학해서 1942년 12월에 제 9기로 졸업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1943년 4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자무쓰(佳木斯) 부대를 거쳐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다. 1943년 12월 러허성(熱河省)에서 간도특설대 기박련(機迫連:기관총·박격포중대)소속으로 팔로군 공격작전에 참가했다.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국군 중위였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9월에 만주국 젠다오성(間島省) 성장 이범익(李範益)의 건의를 받아들여 옌지현(延吉縣) 특무기관장 겸 젠다오지구 고문인 오고에(小越信雄) 중좌가 주도해서 만든 조선인 특무부대다. 일본인 군관 7명, 조선인 위관 9명과 조선인 사관 9명을 먼저 선발하여 옌지현 명월구에서 같은 해 12월 15일 제1기 지원병 입대식을 열었다. 모두 7기까지 모집한 간도특설대는 총인원 740여 명 중에서 하사관과 사병 전원, 그리고 군관 절대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차례 ‘토공(討攻)’작전을 벌였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으며,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약탈·고문을 당했다.

일제가 패망하자 9월초 고향으로 돌아가 평안남도 도인민위원회 치안대장을 지냈으며 평양에 있던 조만식의 비서를 잠시 지냈다. 1945년 12월 간도특설대 출신의 김백일·최남근 등과 함께 월남했다. 같은 달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해서 1946년 2월 제 1기로 졸업한 뒤 육군 중위로 임관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육군본부 정보국장(대령)으로 재직하면서, 좌익을 제거하기 위한 숙군(肅軍)작업을 지휘했다. 1948년 11월, 박정희 소령이 ‘여순사건’이후 남로당 활동 혐의로 체포되자 구명에 앞장서 문관 신분으로 정보국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했다. 1949년 7월 제 5사단장으로 부임했고, 1950년 4월부터 제1사단장으로 복무하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났다. 1950년 7월 준장으로 진급했고, 1951년 1월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지냈다. 1953년 1월 한국군 최초로 대장으로 진급했다. 1959년 2월부터 1960년 5월까지 연합참모본부 의장을 지내고 5월말 예편했다.

1960년 7월 주중화민국대사, 1961년 7월 주프랑스 대사, 1965년 7월 주캐나다 대사를 거쳐 1969년 10월부터 1971년 1월까지 교통부장관을 지냈다. 1973년 4월부터 1980년 3월까지 한국종합화학공업주식회사 사장을 지냈다. 2008년 5월 대한민국 건국60주년기념사추진위원회 고문에 위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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